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 국보 제130호
소재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죽장2길90
연 대 : 통일신라
선산 읍내에서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죽장사터에 있는 석탑으로, 주변에 석재와 기와조각이 널려 있어 건물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닥돌에서 머리장식에 이르기까지 100여 개가 넘는 석재로 짜여져 있으며, 전탑형의 오층탑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높이가 10m에 이른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리장식을 얹고 있는 거대한 모습이다. 탑신부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감실(龕室)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주위로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지붕돌의 아래·윗면은 전탑(塼塔:벽돌로 쌓아올린 탑)에서와 같이 계단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양식인 2단의 기단을 형성하고 있지만, 기둥조각을 새기지 않은 탑신의 몸돌이나 지붕돌의 모습은 전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안동과 의성지역에서 유행했던 모전석탑(전탑의 양식을 모방한 석탑) 계열로 보여지며, 웅장하고 세련된 통일신라 석탑의 우수한 조형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 보물 제251호
소재지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산로 275-209
연 대 : 고려시대
천태교를 수립한 대각국사(1055∼1101))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석비이다. 대각국사는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중국 송나라와 일본의 서적을 교정·간행하여 『속장경』을 완성한 승려로,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여 고려 불교의 융합을 실현하였다.
비의 형태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은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지붕돌에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비문에는 대각국사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인예대후이며, 자는 의천이라는 것과 천태교를 확립하는 과정 및 가르침 등이 실려있다.
고려 인종 10년(1132)에 세웠으며, 비문은 임존(林存)이 짓고, 승려 인(麟)이 썼다. 비문의 글씨는 가로획이 가늘고 세로획이 굵은 독특한 필체이다. 필력은 힘차고 짜임새는 가지런하다.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 : 보물 제469호
소재지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837-4
연 대 : 통일신라
선산은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파되었을 때와 인연이 있는 곳으로 거대한 석탑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일대의 경작지에서 연꽃무늬가 새겨진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많은 기와조각과 토기조각 등이 발견되어 이 부근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탑은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부는 아래층 기단 가운데돌에 모서리기둥 2개와 가운데기둥 3개, 즉 한 면에 5개의 기둥이 새겨져 있다. 위층 기단 가운데돌에는 모서리기둥 2개와 가운데기둥 2개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남쪽에 불상을 모시기 위한 방이 설치되어 있고, 방 입구에는 문을 달았던 동그란 구멍이 남아 있다. 지붕돌은 아래받침과 지붕 추녀, 윗면 층단 모두 전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지고 머리장식을 받치던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이 탑의 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3개나 새긴 것은 초기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는데, 몸돌과 지붕돌의 구성방법은 다소 시대가 떨어지는 면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양식은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국보 제130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일종의 모전석탑 계열에 속하는 유형이다. 돌의 구성에서도 규율성을 잃지 않고, 기단부의 구조와 각 부를 짠 수법으로 보아 석탑의 건립시기는 8세기경인 통일신라 전기로 추정된다.
금오산 마애여래입상 : 보물 제490호
소재지 :경상북도 구미시 금오산로 433-3
연 대 : 고려시대
절벽의 바위면을 깎아 만든 높이 5.5m의 고려시대 마애여래입상으로, 암벽의 모서리 부분을 중심으로 양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얼굴은 비교적 원만하고 부피감도 있지만, 가는 눈과 작은 입에서 신라시대의 마애여래입상과는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어깨나 팔의 부드러운 굴곡은 얼굴에 어울리는 형태미를 묘사하고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오른손이나 지나치게 큰 왼손, 둔중하게 묘사된 두 발, 경직된 U자형의 옷주름 등에서 신라시대보다 둔화되고 위축된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불상이 딛고 서 있는 반원형의 연꽃 대좌(臺座)와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서도 나타난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얼굴·신체·옷주름·광배 등에서 신라시대 보살상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고려시대의 마애여래입상으로 볼 수 있다.
구미 해평리 석조여래좌상 : 보물 제492호
소재지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4길86
연 대 : 통일신라
보천사의 본존불로 얼굴과 신체에 약간의 손상이 있을 뿐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구분이 잘 안된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탄력없이 쳐지고 있으나 배에 있는 띠 모양의 매듭은 독특한 모습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놓은 모양으로 땅속의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불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의 표현과 부처가 앉아있는 대좌(臺座)이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모두 2중의 원으로 표현되었는데 원 안에는 덩쿨무늬가 있고, 머리광배의 중심부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광배의 곳곳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으며 아래쪽에는 향로가 새겨져 있다. 가장자리에는 화려한 불꽃무늬가 광배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대좌는 상·중·하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윗부분에는 반원형태로 활짝 핀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중간과 아래부분은 8각형으로 각 면에 연꽃무늬, 구름무늬, 비천상 등이 새겨져 있다.
섬세하고 화려한 광배와 대좌, 단정한 체구와 얼굴 등에서 9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달성 태고정 : 보물 제554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638
연 대 : 조선시대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한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 들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한쪽 구석에 둔 것은 흔치않은 것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다.
칠곡 노석리 마애불상군 : 보물 제655호
소재지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노석리 산43-2
연 대 : 통일신라
거대한 바위면에 얕게 새긴 이 마애불상들은 통일신라 초기의 것이다. 중앙에 본존불과 본존불을 향하고 있는 좌우 협시보살이 표현된 삼존불(三尊佛) 좌상인데, 오른쪽 협시보살 옆에 작은 불좌상이 하나 더 배치된 특이한 구조이다.
본존불은 양감있는 얼굴에 비해 작은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어 균형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주름이 왼쪽 어깨에서 앞을 돌아 오른쪽 무릎 위에 이르는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형식적이다. 머리 주위로는 몸 전체의 빛을 나타내는 둥근 광배(光背)가 뚜렷하고, 그 주위에 새겨진 불꽃무늬들은 화려하다. 왼쪽 협시보살은 세부수법이 본존과 비슷하다. 가슴 앞에 표현된 U자형의 긴 융기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이러한 표현은 4불상에 모두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발목이 서로 교차하는 자세로 우리나라 불상에서는 유일한 예이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왼쪽과 거의 같은데 다만 왼손으로 연꽃봉오리 같은 것을 들고 있는 점이 다르다. 별도로 조각된 여래좌상은 본존불과 거의 비슷하다. 자세는 오른쪽 발을 내린 반가(半跏)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왼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있지 않고 밑으로 내려 놓았다.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 보물 제1122호
소재지 :경상북도 구미시 옥계2 공단로91-26
연 대 : 통일신라
거대한 자연암벽의 동남쪽 평평한 면을 이용하여 조각한 거구의 마애여래입상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고,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잘 정제되어 있다. 귀가 길게 느리워지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어 근엄하면서도 자비스러운 인상이다. 양 팔에 걸쳐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은 가슴부터 배꼽에 이르는 무늬가 양쪽 다리에 이르러 각기 완만한 활모양의 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린다. 손은 가슴까지 올리고 있는데, 왼손은 바닥이 안을 향하게 하고, 오른손은 밖을 향하게 하여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불상은 원만한 인상, 잘 정제된 이목구비,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 등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으로 추정된다.
달성 삼가헌 : 중요민속문화재 제104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4길15
연 대 : 조선시대
달성군 하빈면 묘동은 사육신 중 하나인 충정공 박팽년(1417∼1456) 후손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삼가헌은 박씨 집성촌과는 낮은 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 손인 성수聖洙가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 뒤 그의 아들 광석光錫이 1783년 이웃 묘골에서 현재 위치로 분가한 다음 1809년 초가를 헐고 안채를 지은 다음 1826년 사랑채를 지었다. 별당인 하엽정(荷葉亭)은 연꽃잎의 정자라는 뜻으로 1826년 집을 지을 당시 많은 흙을 파낸 자리에 박광석의 손자 규현이 1874년에 연못으로 꾸며 연을 심고 파산서당을 앞으로 옮겨 지으면서 하엽정이라 당호를 붙였다.
삼가헌三加軒이라는 이름은 중용에서 나왔다. 중용 제 9장에는 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자왈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도가답야, 중요불가능야) 라는 문구가 있다. 이 글은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 위를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천하를 다스림은 知이고, 작록을 거부하는 것은 仁이며.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勇에 해당한고 한다. 즉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이다.
하엽정은 원래 4칸 규모의 1자형 건물이었는데 앞에 누마루를 한 칸을 늘여 붙였다고 한다. 연못은 앞쪽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이고 가운데 원형 섬이 있고 섬까지는 외나무다리가 있어다. 이 별당은 원래 서당으로 쓰던 곳으로 앞에는 <하엽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파산서당巴山書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안채는 전면 6칸 전퇴집으로 3평주 삼량집으로 2009년 4월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전체적으로 볼때,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배치관계는 대략 튼 ㅁ자형에 가까운 것이라 하겠다. 별당채는 이들의 서편에 별곽(別廓)으로 담장을 돌려 전후로 연못과 후원을 두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三可軒)는 왼편에 4간대청을 두고 바른편에는 2간 온돌방을 두었으며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2간 온돌방에는 겉으로 각기 골방이 있고 아랫방 아랫목에도 작은 골방과, 벽장 , 다락문을 갖추고 있어 사랑방의 수장(收藏)공간은 매우 다양하게 안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벽장의 쌍호(雙戶)에는 “성(誠)”“경(敬)”2자를 묵서게시(墨書揭示)하여 유가적(儒家的) 좌우명으로 하였고 대청벽에는 “삼가헌(三可軒)”편액이 걸려있다. 큰방 곁으로 툇마루에 연하여서는 1간의 청지기 방이 있고 앞뜰끝에는 차면(遮面) 판벽(板璧)을 세워 내대문(內大門)과의 간격을 막고 있다. 4간대청 안쪽으로는 1간의 마루방인 서고(書庫)를 두었으며 그 뒤로 연해서는 온돌방 1간(작은사랑)을 두었다. 이 방앞에 장독대와 우물이 있고 뒤에는 3간통(間通)의 곳간채가 있다. 사랑대청 안쪽 끝기둥에 의지해서는 뜰에 판장으로된 협문(夾門)을 두어 부엌 앞마당과의 경계를 짓고 있다.
안채는 길이가 6간이고 보간의 너비가 2간이며 고패부는 부엌에서 앞으로 1간, 건넌방 끝에서 2간인데 그 너비는 모두 1간씩이다. 부엌자리는 안방과 나란히 올려붙인 영남식 배치이고 건넌방과 그 아랫방의 배치도 간혹 있는 윗상방, 아랫상방식 배치를 보여준다. 윗상방은 역시 공통적인 건넌방의 기능을 가지며 아랫상방은 안사랑의 기능을 갖게 된다. 윗상방 웃간문 위에는“길상실(吉祥室)”3자를 백지에 써 붙였고, 아랫간문 위에는 “청좌계심상(淸坐契心賞)”이라 써 붙였다. 안방에 써 붙인 춘첩문구(春帖文句)는 웃간에 “춘풍생복수(春風生福壽)”아랫간에 “천지일가춘(天地一家春)”그리고 대청문 위에는 “의실의가(宜室宜家)”등을 붙였다. 건너방 뒤와 아랫상방 앞에는 길게 쪽마루를 두어 통로를 삼았다. 부엌옆 곳간채의 안끝에서는 부엌쪽으로 토담을 일자로 내 쌓아서 차면 (遮面)하였고 담장 안쪽에 바로 내측(內厠)을 두었다.
사랑대청 옆으로 긴 토담에 일각문을 내었는데 이것은 별당출입문이다. 하엽정(荷葉亭)은 ㄱ자집이고 길이가 4간이며 보간 너비가 전후의 퇴를 제하면 1간이다. 왼편 끝방 앞에 1간의 누마루를 꾸몄다. 온돌방은 3간이 넘고 마루는 가운데 1간에 그쳤으며 마루와 그 옆방 뒤편은 모두 툇마루이다. 마루는 전후에 4분합을 달았고 전퇴(前退) 4간도 모두 마루이다. 2간 온돌사이에는 네짝 장지문을 달았고 끝방 안쪽은 골방이다. 하엽정(荷葉亭) 편액(扁額)은 중온돌(中溫突) 미상(楣上)에 걸려 있다. 하엽정은 그 앞에 꽤 큰 연못을 두었고 넓은 후원에는 죽림(竹林)을 두었다. 연못은 길이가 21m, 너비가 15m의 수면을 가졌으며 가운데에 원형 중도(中島)를 두었고 지중(池中)에는 하화(荷花)를 심었다. 중도에는 원래 백일홍이 일주가 있었다고 한다. 못둑에는 매화수(梅花樹), 이수(梨樹) 등이 배치 되었으며 남쪽 담장 너머에는 현가주(現家主)의 고조(高祖)가 심었다고 전하는 높이 20m의 도토리 나무가 일주 남아 있다. 서쪽 담장너머 가까운 산에는 송림이 무성하다. 이 삼가헌과 그 향원(鄕園)은 원래 박팽년(朴彭年)의 11대손인 성수(聖洙)(호(號) 3가헌(三可軒)·증리조참판(贈吏曹參判))가 은거향제(隱居鄕第)로 조성한 것이며 그 초창은 영조(英祖) 45년(1769)이라고 전한다. 이분은 77세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묘동(妙洞)은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 낙남(落南)하여 이룩한 동족부락이며 사육신(死六臣)을 향사하는 사당과 태고정(太古亭)과 같은 종중(宗中) 고가(古家)도 전래하던 역사있는 마을이다.
달성 하목정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목정길56-10
연 대 :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낙포 이종문이 조선 선조 37년(1604)에 세운 정자이다. ‘하목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서 잠깐 머물렀던 인조(재위 1623∼1649)가 훗날 낙포의 첫째 아들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준 것이다. 또한 일반 백성들의 주택에는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인 부연을 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인조가 명령하여 이 집에는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사랑채로 이용되었던 이 집은 전체적으로 T자형 구조로 되어있어서 처마곡선도 부채 모양의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내부에는 김명석·남용익 등 많은 유명인들이 쓴 시가 액자가 걸려있다.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기전 이곳에 머문적이 있어 그후 이종문(李宗文)의 장자(長者)인 이지영(李之英)에게 하목정(霞鶩亭)이라는 정호(亭號)를 써주었으며 또한 사가(私家)에서는 서까래위에 부연(附椽)을 달지않은 것이 일반적이나 인조(仁祖)의 명으로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구미 채미정 : 명승 제52호
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249
연 대 : 조선시대
채미정은 고려에서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고 금오산 아래 은거한 야은 길재(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영조 44년(1768년)에 금오산 아래 건립한 정자이다.
채미정은 멀리 바라보이는 금오산과 채미정 전면의 맑은 계류와 수목들이 채미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경관미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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