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곡성 태안사 문화재탐방

소솔바람 2012. 11. 11. 06:44

태안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태안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이름모를 스님 세 분이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광자대사가 크게 늘려 지었는데 이 때 절의 규모는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고, 법당에는 높이 1.4m되는 약사여래철불좌상을 모셨던 듯하다. 고려 고종 10년(1223)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고쳐 지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숙종 10년(1684)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초에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때 많은 피해를 입어서 지금 있는 건물은 대부분이 복원된 것이다.
경내에는 혜철선사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 승무를 출 때 사용하던 태안사대바라(보물 제956호), 태안사동종(보물 1349호), 태안사일주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태안사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170호) 등이 있다.

 

곡성 태안사 능파각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18-1

연   대 :

태안사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일종의 다리건물이다.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능파(凌波)’라 이름하였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함을 상징한다.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24년(941) 광자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43년(1767)에 다시 지었다.
다리를 건너는 쪽에서 보았을 때 앞면 1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이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하여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배치하는 주심포 양식이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 기둥을 사용하였다.
여러 가지 동물상을 조각한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다리와 문·누각의 역할을 함께 하도록 지은 특이한 건물이다.

 

곡성 태안사 일주문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연   대 :

태안사 입구에 있는 일주문(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의식적인 상징물)으로, 능파각에서 약 200m쯤 지나 높직한 돌계단에 올라서 있다. 조선 숙종 9년(1683)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하였다.
태안사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앞면 1칸의 규모로 세웠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웠다.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이다. 앞·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로 꽉찬 느낌이 들며, 매우 화려하다.
일주문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앞면에는 ‘동리산태안사 (桐裏山泰安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곡성 태안사 삼층석탑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0호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연   대 :

태안사 내 연못 중앙에 마련된 작은 터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절 내의 광자대사 부도 앞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원래는 기단(基壇)의 한쪽 면과 탑신(塔身)의 1층 지붕돌, 2·3층 몸돌이 없어진 상태였는데,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이 보충하여,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갖추고 있다.
기단 아래로는 탑을 옮길 때 마련해 둔 3단의 받침이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높다란 풍채를 보인다. 기단은 각 층마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으며, 윗면에 3단의 얕은 층을 내어 윗돌을 괴고 있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 놓인 머리장식은 낮은 장식받침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이 만들어 올려놓은 것들이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훗날 보충해 놓은 것이긴 하나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과 안정감이 느껴진다. 기단과 지붕돌의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 : 보물 제273호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연   대 : 통일신라

이 탑은 승려 적인선사 혜철의 탑으로,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태안사는 신라시대 선(禪)을 가르치는 유명한 종파인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로 이름이 높으며, 적인선사 혜철(惠哲)은 태안사가 속한 동이산파를 연 스님이다.
이 탑은 전체적인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3단의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아래받침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면마다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은 그 높이가 매우 낮고, 면마다 가늘고 길게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윗받침돌은 옆면에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몸돌은 낮은 편이지만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며,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다. 그 옆면에 다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넓은 편으로 밑면에는 서까래를,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건축의 지붕양식을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추녀의 곡선은 완만하며, 각 귀퉁이는 급하게 치켜올려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잘 남아있다. 이러한 머리장식들은 기단과 탑신의 화려한 조각들과 어울려 탑을 전체적으로 장엄하게 보이도록 한다.
탑의 전체적인 형태는 무겁지만 너그러운 품위를 지녔고, 각 부분의 조각은 매우 자세하게 새겨져있어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러 양식상 석탑을 비롯해 돌로 만든 조형물들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경향인데, 이 탑은 매우 뛰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
탑 옆의 비문을 보면, 적인선사는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하였다. 따라서, 이 탑도 적인선사가 돌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 : 보물 제274호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연   대 : 고려시대

태안사 입구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광자대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광자대사는 태안사의 2대 조사(祖師)로,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혜종 2년(945) 82세로 입적하였다. 자는 법신(法身)이고 법명은 윤다(允多)이다.
탑의 형태는 바닥돌부터 꼭대기까지 8각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모습이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유난히 낮은 가운데받침이 올려져 있다. 윗받침에는 16잎씩의 연꽃을 두 줄로 조각하여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몸돌은 앞뒷면 모두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모양을 새겨두었고, 그 옆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높은 편이나 추녀에 이르러 얇아지고 있어 중후한 감을 덜어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흔하지 않게 머리장식부분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완벽한 형태미를 보여주며, 각 부의 구성과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조화롭다.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보물 제275호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연   대 : 고려시대

태안사에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탑비이다.
광자대사는 태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다.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수도를 하였고,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승려가 되었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비는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으며, 거북받침 위에 머릿돌만 얹혀져 있는 상태이다. 거북은 목이 짧아보이기는 하지만,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등 위로는 비를 얹기 위한 받침대가 새겨져 있는데, 옆면에 보이는 무늬가 어떤 것을 표현한 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머릿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 제53호)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 제54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비몸돌의 파손으로 비문은 거의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지만 다행히 『조선금석총람』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그 전문이 실려있어, 광자대사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공양왕의 옆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곳곳의 여러 조각들을 통해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려 했던 참신한 의도가 엿보이는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5년 후인 광종 1년(950)에 세운 작품이다.

 

곡성 태안사 동종 : 보물 제1349호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연   대 : 조선시대

태안사 대웅전 안에 놓인 이 동종은 조선시대 전기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많은 탄압을 받던 시기에 왕실의 도움없이 사찰 불사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부드럽게 한다는 음통과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을 새긴 용뉴가 있다. 그리고 어깨에는 1단의 연꽃무늬가 돌려 있고, 그 밑에 넓은 띠에는 방형 속에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작은 원 속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넓은 몸체에는 네군데에 사각형의 유곽이 있는데 그 주위는 당초문으로 장식을 하고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연꽃속에 넣었다. 밑부분에도 어깨띠와 비슷한 넓은 띠가 있는데 연꽃무늬와 당초문을 새겨 넣었다.
종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조선 세조 3년(1457)에 이 종을 처음 주조했으나 파손되어 선조 14년(1581)에 다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한국종의 독창적인 조형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이 종은 조선전기 동종양식의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전통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접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작과 관련된 명문이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주조기술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담양 개선사지 석등 : 보물 제111호

소재지 :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학선리 593-2

연   대 : 통일신라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는데, 최근에 바닥을 파고 흩어진 부분을 정리하여 다시 세웠다.
높이 3.5m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 모양이 새겨졌고, 사잇기둥은 장고모양이며,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8각이며 창이 8면에 뚫렸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낮고 널찍한 괴임이 있고, 8각의 끝부분에는 꽃모양을 둥글게 조각하였다.
석등의 창 사이 공간에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글씨를 새긴 유일한 예로, 비슷한 시대의 다른 작품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표준이 되는 작품이다.

 

 

곡성 가곡리 오층석탑 : 보물 제1322호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2

연   대 : 고려시대

가곡리 매봉 북쪽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은 모습이다.
가곡리 오층석탑의 맨 아래 바닥돌은 시멘트로 만든 기단에 묻혀 있어 원래 모습을 알 수 없다. 탑의 아래기단에는 기둥 모양이 없으나 윗기단에는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다. 5층의 지붕돌은 알맞은 비례로 줄어들었는데, 1층 몸돌은 4매의 돌, 2층 이상의 몸돌은 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각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이 표현되어 있다. 2층부터 5층까지의 몸돌 남쪽면에는 네모난 홈을 파서 감실의 효과를 내었다.
1층부터 4층까지의 지붕돌 받침은 3단이고, 5층 지붕돌 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지붕돌 윗면의 경사는 완만하나 양끝의 귀마루가 매우 두텁게 표현되어 백제계 탑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지붕돌의 처마선은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어 올려졌고, 지붕돌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음직한 구멍이 있다. 특히, 매층 지붕돌 위에 또다른 돌로 몸돌받침을 만들어 몸돌을 괴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이 석탑은 맨 위부분인 상륜부를 제외한 각부의 부재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은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건립되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은 담양 남산리 오층석탑(보물 제506호)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탑신과 지붕돌에 나타난 표현양식과 더불어 몸돌받침이 있는 점은 고려시대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조각기법이 매우 세련되며 안정감을 보이는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백제 옛 터에서 나타나는 백제계 석탑으로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다.

 

광주 충효동 정려비각 : 광주광역시 기념물4호

소재지 : 광주광역기 북구 충효동 440

연   대 :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덕령(1567∼1596)과 그의 부인 흥양 이씨, 그의 형 김덕홍(1558∼1592), 그의 아우 김덕보(1571∼1596) 등 일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마을 앞에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김덕령은 그의 형이 고경명의 지휘 아래 참전한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자 상중(喪中)인데도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와 고성 등지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으로 혹독한 고문 끝에 20일만에 옥사하였다. 그의 부인 이씨는 정유재란 때 추월산에 피신해 있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순절하였다. 또한 그의 동생은 두 형을 잃고 전쟁 후에 잠시 장릉참봉이란 벼슬을 지냈을 뿐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 비는 정조 13년(1789) 세운 것으로 높이 220㎝·너비 68㎝이며, 위쪽에는 비각을 얹어 놓았다.
비각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이 둘렀다. 특히 비석의 뒷면에는 김장군 일가의 충·열·효에 대한 칭찬의 글 뿐 아니라 ‘충효지리(忠孝之里)’라는 동네 이름까지 임금이 직접 지어 내렸다는 내용이 써있어 특이하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