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서산지역 문화재 탐방

소솔바람 2014. 3. 24. 12:47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 국보 제84호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2-10

연  대  : 백제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여 형성되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는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장쾌하고 넉넉한 미소를 머금은 석가여래입상,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간직한 제화갈라보살입상,천진난만한 소년의 미소를 품은 미륵반가사유상은 백제특유의 자비로움과 여유를 느끼게 해준다.

이들 불상의 미소는 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아침에는 밝고 평화로운 미소를,저녁에는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볼 수 있다. 동동남 30도,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서있어 햇볕을 풍부하게 받아들이고,마애불이 새겨진돌이 80도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아 미학적 우수함은 물론 과학적 치밀함도 감탄을 자아낸다.

얼마동안을  넋 잃고 바라본 나의 눈가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산 보원사지 : 사적 제316호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46외

연  대  : 백제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보원사의 옛터로 통일신라~고려초에 크게 융성 하였고 왕사,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묻힌 곳이며,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대사찰이었다.

서산 보원사지 석조 : 보물 제102호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150

연  대  : 통일신라

서산 보원사터에 위치한 석조이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던 곳이다.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팔각형·장방형 등이 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인다.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냥 남아 있어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는지도 알수 없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 : 보물 제103호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105

연  대  : 통일신라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은 옛 절터로, 지금은 주변이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는데, 땅을 갈 때 가끔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 보물 제104호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119-1

연  대  : 고려시대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 : 보물 제105호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119-2

연  대  : 고려시대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은 사리탑 혹은 탑이라 하여 절의 한켠에 세워두며,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쌓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어둔다.
이 탑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 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서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 제106호)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 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 보물 제106호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119-2

연  대  : 고려시대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서산 개심사 대웅전 : 보물 제143호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321-86

연  대  : 조선시대

절의 기록에 의하면 개심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 백제 의자왕 14년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진덕여왕 5년(651)과 의자왕 14년(654)은 다른 해에 해당한다.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654)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1941년 대웅전 해체 수리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고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건물은 고쳐 지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개심사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이 건물은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양식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과 대비가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서산 개심사 영산회괘불탱 : 보물 제1264호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321-86

연  대  : 조선시대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화면 중앙에 서 있으며 둥근 얼굴, 비대한 어깨, 유난히 길고 굵은 팔, 짧은 하체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옷에는 둥글고 변형된 덩굴무늬가 빽빽하게 장식되어 있고, 석가모니불 뒤의 광배에는 모란 줄기와 연꽃무늬 등이 새겨져 있다. 석가의 머리 주변엔 7구의 화불이 둥글게 앉아 있으며, 옆으로는 2구의 비로사나불과 노사나불이 석가를 협시하고 앉아 있다. 석가의 몸통 주변에는 8구의 화불이 좌우로 앉아 있으며 맨 아래 부근에는 2구의 제석천과 범천이 손을 모은 자세로 석가를 향해 서 있다.
조선 영조 48년(1772)에 그려진 이 그림은 임금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아름답고 복잡한 문양에서 매우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비현실적인 신체비례와 복잡한 문양에서 18세기 후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제1619호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321-86

연  대  : 고려시대

이 아미타불상은 최근(2004년) 발견된 복장물 <아미타불상중수 봉함판>의 수보묵서명(修補墨書銘)에 의해 고려 충렬왕 6년(1280) 불사를 위해 특별히 설립된 승재색(僧齋色)의 주관 하에 내시 시흥위위(內侍試興威衛)의 장사(長史) 송(宋)씨가 보수를 담당한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 불상의 제작연대가 중수연대인 1280년보다 앞선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사를 주관한 승재색은 고려 충렬왕 무렵에 설치되어 경전의 간행, 사찰의 중수, 불상의 개금과 보수, 불교제의 등을 담당하던 관부로 생각되며, 위의 아미타불상 중수는 현재까지 발견된 승재색의 불사활동 관련 자료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이 불상은 상의 형상이 단정하면서도 중후하며 알맞은 신체비례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조각기법도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특히 뚜렷하면서도 엄숙하게 표현된 이국적인 얼굴, 왼쪽 어깨에 몇 가닥의 짧은 종선으로 처리된 옷 주름과 그 아래로 자리 잡은 겹O형 주름 등은 1274년에 중수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상이나 13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불좌상 등과 시대양식을 공유하면서도, 이들 상보다 훨씬 건장하고 생동감 넘치는 조각기법을 보여주고 있어 고려후기 목조불상 가운데 최고(最古)의 작품일 가능성을 보여 주며, 조각적인 측면에서도 가장 완성도 높은 불상으로 평가된다.

 

서산 개심사 심검당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8호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321-86

연  대  : 조선시대

절의 기록에 의하면 개심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 백제 의자왕 14년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진덕여왕 5년(651)과 의자왕 14년(654)은 다른 해에 해당한다. 절 안에는 개심사 대웅전(보물 제143호)을 비롯하여 명부전, 무량수각 등의 문화재가 있다.
그 중 심검당은 건축연대를 기록한 문헌이 없어 지은 시기를 알 수 없고 단지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인데 건물 왼쪽에 앞면 3칸·옆면 5칸 규모의 덧집이 붙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