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남도의 늦은 가을을 보고픈 마음에 우리나라 정남진 전라남도 장흥군을 향해 달립니다. 차장엔 온통 붉게 물든 단풍을 보노라면
전남 강진 출신 시인 "김영랑" 선생의 " 오메 단풍들겄네"를 음미 해 봅니다. 11월 첫째 토요일....오후시간에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 기슭에 자리잡은 "보림사"의 가을풍경에 흠뻑 취하고 싶은 마음에 일주문을 들어 섭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인 "보림사"는 860년 (헌안왕4년) 보조선사 체징이 지은절로서 통일신라시대의
구산선문중 하나 였던 절입니다. '가지산파'의 근본도량으로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3보림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으나 한국전쟁중 사찰의 소실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천문에 모셔진 사천왕상은 다른절의 사천왕상에 비해 온유 한 것이 특징입니다.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 보물 제 1254호
소재지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45
연 대 : 조선시대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은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얼굴은 분노한 표정을 하였으며, 복장은 갑옷과 천의(天衣)를 입고 있다.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으로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에서 부드러운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비파를 들고 있으며, 발 아래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다리를 받쳐들고 있다.
남방 증장천왕은 굳게 다문 입과 함께 근엄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고 있으며, 왼손은 무엇인가 쥐고있는 듯한 자세만을 취하고 있다. 당당해 보이는 신체는 수호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지르는 듯한 위엄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에는 깃발을 잡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들고 있었던 모습인데 보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대부분이 중국식 갑옷에 각기 다른 상징물을 들고 있으며 발 밑에는 악귀를 밟는 형태상의 특징을 갖는다. 또한 무장한 분노상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보관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귓바퀴를 돌아 어깨 위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자비로운 보살상의 모습이 추가되고 있다.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이러한 특성을 가장 앞서 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적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조성시기는 천왕문에 걸린 목판과 『보림사중창불사기록』에 의하여 중종 10년(1515)에 조성되고 이후 2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림사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각 부의 조각이 매우 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기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제44호
소재지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45
연 대 : 통일신라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구조와 크기가 같으며, 2단으로 쌓은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은 위층이 큰데 비해 아래층은 작으며,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매우 얇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으며, 각 층 몸돌에 모서리기둥을 새겼는데, 2·3층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계단형으로 5단씩이고, 처마는 기단의 맨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하며, 네 귀퉁이는 심하게 들려있어 윗면의 경사가 급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석등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쳐주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여러 장식들 놓여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탑들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전형적(典型的)인 양식(樣式)으로 석제상륜(石製相輪)까지 완전(完全)하게 갖추고 있는 희소(稀少)한 석탑(石塔)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놓여 있는 삼층석탑은 하층기단에 2탱주(撑柱), 상층기단에 1탱주를 간략하게 모각(模刻)하였고 상대갑석(上臺甲石) 윗면에 각형(角形)과 호형(弧形)의 탑신(塔身)받침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주목(注目)되는 것은 양탑이 다 완전(完全)하며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보주(寶珠) 등 상륜부(相輪部)를 순서대로 나란히 갖추고 있어 신라(新羅) 말기(末期) 석탑연구(石塔硏究)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석등(石燈)은 탑과 더불어 전부재(全部材)를 완전(完全)히 갖춘 것으로서 전형적(典型的)인 양식(樣式)을 취하고 있다. 방형(方形)의 넓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역시 방형의 대석과 8각(八角)의 기대석(基臺石)이 놓였다.
기대석은 연화하대석(蓮華下臺石)보다 크기가 작으며 각측면(各側面)에는 안상(眼象)이 장식(裝飾)되어 있다. 연화하대석은 8엽복판연화(八葉複瓣蓮華)로서 귀꽃을 갖추고 있으며 간주석(竿柱石)은 8각주(八角柱)로서 짧은 편이다. 상대석은 원형평면(圓形平面)으로 연판(蓮瓣)은 중판(重瓣)으로 판내(瓣內)에는 중엽(重葉)을 장식하였다. 화사석(火舍石)에는 4면에 화창(火窓)을 구비하고 있으며 옥개석(屋蓋石)에는 아담한 귀꽃을 갖추고 있다. 정상(頂上)에는 중엽의 단판8엽연화문(單瓣八葉蓮華紋)을 장식하였고 그 위에 고복형(鼓腹形)의 상륜(相輪)과 보개(寶蓋)를 안치(安置)하고 최정상(最頂上)은 수연형(水烟形)의 보주(寶珠)로 끝막음하였다.
이들 석탑과 석등의 조성연대(造成年代)는 탑에서 발견된 탑지(塔誌)에 의해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10년(870, 함통(咸通) 11년)을 전후한 것임이 밝혀져 석탑, 석등 연구에 기본이 되고 있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117호
소재지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45
연 대 : 통일신라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통일신라 전성기(8세기)의 불상에 비해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고,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탄력이 감소되고 느슨해진 신체의 윤곽선과 몸 전체를 두텁게 감싸고 있는 법의(法衣)의 느슨하면서 얇게 빚은 듯한 옷주름(평행밀집계단식(平行密集階段式) 의문(衣文)) 등에서 9세기 후반기 불상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왼쪽 팔 뒤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신라(新羅) 헌안왕(憲安王) 때 무주장사(武州長沙)(현 광주(光州)·장흥(長興))의 부관(副官)이었던 김수종(金遂宗)이 헌납하여 헌안왕 2년(858)부터 1년간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시주자(施主者)인 김수종이 불상을 헌납한 장선사(莊禪寺)는 바로 선종9산문(禪宗九山門)의 하나인 보림사문파(寶林寺門派)를 연 보조선사(普照禪師)이므로 이 불상은 선사상(禪思想)과 화엄사상(華嚴思想)의 융합에 의하여 만들어진 비로자나불상임을 알 수 있고, 이후 크게 유행하는 비로자나불상의 시조격이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헌안왕 3년(859)에 불상이 완성되었다는 불상조성 절대연대를 알 수 있어서 불상편년연구(佛像編年硏究)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9세기 후반기 철불 유형의 확실한 첫 예이자 새로운 양식의 선구적인 걸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 보물 제157호
소재지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산10-1
연 대 : 통일신라
보조선사(804∼880)는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 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탑은 바닥돌부터 지붕돌까지 모두 8각으로, 통일신라 부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탑신(塔身)을 받치는 기단(基壇)의 아래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매우 입체적으로 조각하였고,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로 띠를 두른 약간 배가 부른 모습이다. 8개의 큰 연꽃조각 위에 놓여진 탑신의 몸돌은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그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겼다. 두터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서까래를 표현해 놓았고, 윗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파여져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완전한 모양은 아니지만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탑신의 몸돌이 지붕돌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지붕돌의 질감이 달라서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다. 일제시대 때 사리구를 도둑맞아 쓰러졌던 것을 복원한 바 있는데 이때 일부분이 손상되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상(上)·중(中)·하대석(下臺石)의 각부에는 구름과 안상(眼象), 연화문(蓮華紋) 등을 장식하고 탑신에는 문비(門扉)와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으며 옥개석은 기왓골이 표현되었다.
탑비(塔碑)에 의하면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 6년(880)에 보조선사(普照禪師)가 입적(入寂)하자 그의 사리탑(舍利塔)으로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보물 제158호
소재지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산10-1
연 대 : 통일신라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보조선사(804∼880)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의 머리가 용머리를 하고 있어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나운 모습이며, 등 뒤에는 육각형의 무늬가 전체를 덮고 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구름과 연꽃을 새겨 장식해 놓았다. 비몸돌에는 보조선사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김영이 비문을 짓고 김원과 김언경이 글씨를 썼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의 모습을 웅대하게 조각하였고, 앞면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영’이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다.
통일신라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진 비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장흥 전의상암지석불입상 : 시도유형문화재 191호
소재지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45
연 대 : 통일신라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게 표현되었고 얼굴은 계란형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 위까지 U자형 주름을 이루고 있다. 양 팔에 걸쳐진 옷자락은 물결 모양의 주름을 만들면서 무릎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마타여래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원만한 얼굴, 높은 머리묶음, 상체의 옷주름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광배가 일부 파손되었으나 몸체는 목부분만 깨져 보수하였을 뿐 그 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한편 불상은 받치고 있는 대좌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유실되었으며 다만 큼직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대좌로 삼았다.
상호는 계란형으로 원만상이며 머리는 소발(素髮)이다. 상호에 비해 육계(肉계)가 높은 편이며 계주는 없다. 이마 상단 중앙으로 백호가 양각되었으며 눈은 반쯤 떴는데 눈꼬리가 약간 치솟았다. 입은 작게 표현된 반면 입술이 두꺼운 편이며 귀는 길게 어깨위까지 늘어뜨려 측면까지 세밀하게 조각하였다. 삼도(三道)는 목 부분이 깨졌으나 2조선이 표출되어 원래는 삼도가 정연하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가슴 위까지 U자형을 이루면서 왼쪽 어깨로 2조선이 겹쳐서 넘어가고 있다. 양팔목에 표현된 법의자락은 무릎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렸는데 옷주름이 파상문을 이루고 있다. 수인은 왼손이 파손되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오른손의 경우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어 미타징인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 석불은 아미타여래가 될 것이며 봉안된 건물은 극락전이었을 것이다. 맨 하단의 옷주름 밑으로는 두 발이 표현되었다.
광배는 거신광(擧身光)이며 어깨부분 이상으로는 파손되어 없고 어깨 왼쪽편도 손상이 심한 편이다.
이 석불은 원만한 상호와 높은 육계(肉계), 그리고 상체의 의문 표현이나 당당한 어깨선 등으로 보아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경내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가 깊어가는 가을을 더욱 더 재촉합니다. 바람에 떨어진 예쁜 단풍잎 하나를 주웠습니다.
책갈피에 곱게 간직 하였다가 이 가을이 가기전에 시 한 수 적어 볼 요량 입니다...
새볔녘 뭇서리와 가을바람에 감나무 잎파리는 우수수 떨어져 빠알간 감만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보림사" 의 가을은 깊어만 갑니다.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화사 문화재 탐방 (0) | 2011.02.20 |
---|---|
경북영양에서... (0) | 2010.11.15 |
국립경주박물관에서(2)... (0) | 2010.10.28 |
국립경주 박물관에서...(1) (0) | 2010.10.27 |
천년고도 서라벌에서... (0) | 2010.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