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창경궁 문화재

소솔바람 2015. 3. 24. 08:37

창경궁 : 사적 제123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185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은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 등의 침전 및 양화당·여휘당·사성각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창경궁 명정전 : 국보 제226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185

연   대 : 조선시대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1층 건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궁궐의 정전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 위의 장식적인 짜임은 그 짜임새가 매우 견실하며, 그 형태가 힘차고 균형이 잡혀 있어 조선 전기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왕이 앉는 의자 뒤로 해와 달, 5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 병풍을 설치하였다. 건물 계단 앞에는 신하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24개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명정전 남측의 문정전과 주변 행각은 1983년부터 3년간에 걸친 복원공사로 대부분 복원하였고, 일제 때 격하되었던 창경원의 명칭을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창경궁의 명정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지만,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창경궁 홍화문 : 보물 제384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185

연 대 : 조선시대

창경궁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건물이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구고 있다.
여러 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창경궁·창덕궁과 같은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 : 보물 제385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185

연 대 : 조선시대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세울 때에 지은 것이지만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광해군 시절 다시 지었다. 회랑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시대 때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인데, 2칸 규모로 기둥 윗부분에 새부리 모양으로 뻗어 나온 장식을 하였다.
명정문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건물 안쪽은 천장의 뼈대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일부는 천장 속을 가리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의 짜임이 착실하고 알차서 조선 중기의 문을 대표할 만하고 짜임새가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궁궐 중문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경궁 옥천교 : 보물 제386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185

연 대 : 조선시대

이 돌다리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옥류천을 가로 질러 있는 것으로 산천의 정기를 옮겨다 주는 명당수가 흐르는 곳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반원아치형태의 홍예(紅霓) 2개를 이어붙여 안정감이 느껴지며, 궁궐의 다리에 맞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홍예가 이어지는 공간에는 억센 표정을 하고 있는 도깨비얼굴을 새겨놓아 주의를 끄는데, 공간에 맞추려는 듯 이마가 넓고 턱이 좁아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다리의 양옆에 두어 이 곳을 오가는 이들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다리 위는 중간부분이 무지개처럼 약간 둥그스름하며, 다리의 너비는 널찍하게 두었는데, 이는 임금님이 거동할 때 좌우를 옹위하는 의장대 행렬까지 고려한 것이다. 다리의 좌우로는 아름다운 난간을 세우고 양끝의 기둥 위에는 돌짐승을 둥글게 깎아 두었다.
궁궐 안의 다리인 만큼 각 부분의 양식과 조각이 특별하며, 특히 다른 궐의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 이 다리만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창경궁을 짓던 때와 연관지어 조선 성종 14년(1483)인 것으로 여겨진다.

창경궁 통명전 : 보물 제818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185

연 대 : 조선시대

창경궁 안에 있는 왕의 생활공간으로 연회 장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조선 성종 15년(1484) 처음 지었던 건물이 임진왜란의 피해로 불에 타 버려 광해군 때 고쳐 지었으나 정조 14년(1790)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4년(1834) 창경궁을 고쳐 세울 때 같이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7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뻗쳐 나온 재료 구성이 조선 중기 양식의 특징과 정결한 건물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건물 왼쪽으로 돌난간을 만들어 놓은 연못과 둥근 화강석을 두른 샘, 건물 뒤쪽에 꾸민 정원이 한층 더 정감 어린 풍경을 만들고 있다. 궁궐 안 내전 중 가장 큰 건물로 옛 격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세기 건축 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창경궁 팔각칠층석탑 : 보물 제1119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185

연 대 : 조선시대

창경궁 안의 연못 옆에 건립되어 있는 탑으로, 8각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이다.
기단부(基壇部)는 3단의 바닥돌 위로 높직한 1단의 기단이 올려진 모습인데, 각 면마다 조각으로 가득차 있다. 바닥돌은 4각으로 밑단을 두고 그 위로 2단의 8각 바닥돌을 두었는데, 8각의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다. 기단과 닿는 곳에는 1단의 연꽃받침을 놓았으며, 기단은 각 면마다 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기단의 맨윗돌 역시 연꽃무늬와 안상을 장식하였고, 그 위로 높직한 연꽃괴임돌과 2단의 낮은 괴임대를 두어 1층 탑신(塔身)을 받치도록 하였다. 7층에 이르는 탑신의 1층 몸돌은 높고 볼록한 모습이다. 2층부터 낮아지며 지붕돌은 목조건축의 지붕처럼 기왓골이 표시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후대에 보충한 듯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1층 몸돌에는 탑을 세운 때가 새겨져 있어, 조선 성종 원년(1470)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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