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승안사지삼층석탑 외
함양 승안사지 삼층석탑 : 보물 제 294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263
연 대 : 고려시대
승안사터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곳곳에 고려 특유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는데, 위층 기단에는 부처, 보살, 비천(飛天) 등의 모습을 새겨두었다. 또한 위층 기단의 맨 윗돌에는 연꽃조각을 새겨 둘러 놓았는데, 이러한 장식은 보기 드문 모습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고 있다. 2층부터는 몸돌의 크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데, 1층의 몸돌에는 각 면마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여 놓았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고,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의 경사는 급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며 네 귀퉁이가 거의 들려있지 않아 둔중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과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가 남아있다.
대체로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을 잘 따르고 있다. 기단과 탑신의 비례가 균형을 잃어 잘 다듬은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곳곳에 나타나는 특수한 양식이나 장식에 많은 힘을 기울인 흔적 등 고려 전기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 탑은 원래의 위치에서 두 번 옮겨졌는데, 1962년 탑을 옮길 당시 1층 몸돌에서 발견된 사리장치를 통해 처음 탑을 옮겨 세운 시기가 조선 성종 25년(1494)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함양 덕전리 마애여래입상 : 보물 제 375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덕전리 768-6
연 대 : 고려시대
커다란 바위의 한 면을 깎아 불상을 조각한 높이 5.8m의 거대한 마애불로 몸체와 대좌(臺座), 그리고 몸체 뒤의 광배(光背)를 모두 나타내고 있다.
거구의 불상답게 얼굴도 큼직하고 넓적하며 강건한 힘을 느끼게 한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은 비교적 짧고 목 주위에 3줄의 삼도(三道)가 보인다. 직사각형의 거대한 체구와 여기에 걸맞는 큼직한 발 등은 거대한 불상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상체에 비하여 하체가 너무 길며, 손은 신체의 다른 부분, 특히 발에 비하여 매우 작은 편이어서 몸의 균형이 고르지 못하다. 목 중간에서 뒤집어진 스카프형 옷깃과 배와 두 다리로 규칙적으로 접어내린 U자형의 옷주름이 보인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 불상들에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광배에 나타나는 구슬을 꿴 모양의 연주문(連珠紋)과 불꽃무늬, 탑 기단부 모양의 대좌에 새겨진 기둥모양 등 또한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장방형(長方形)의 거대한 체구와 여기에 걸맞는 큼직한 발 등은 거불(巨佛)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지만 전성기의 신라(新羅) 마애불보다는 다소 형식화가 진전된 특징을 보여 준다. 장방형의 체구, 사각형의 짧은 상체, 신체에 비해서 현저히 작은 변형(變形)된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의 두 손과 팔 그리고 통견(通肩)의 불의(佛衣)에 목 중간에서 뒤집어진 스카프형 목깃과 배와 두 다리로 규칙적으로 접어내린 U형 옷주름 등은 바로 고려(高麗) 초기(初期) 불상들의 양식적 특징인 것이다.
이 점은 연주문(連珠紋)과 화염문(火焰紋)이 새겨진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와 기둥을 새긴 탑기단부(塔基壇部) 모양의 대좌(臺座)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 고려 초기 마애불양식을 대표할 만한 걸작으로 생각된다.
함양 교산리 석조여래좌상 : 보물 제 376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함양배움길11
연 대 : 고려시대
현재 함양중고등학교 안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이다. 대좌의 높이까지 포함하여 4m가 넘는 거대한 조각으로 불상 뒤의 광배(光背)가 없어지고, 불상의 얼굴과 오른손, 무릎 및 대좌(臺座) 일부가 없어진 상태이다.얼굴은 몹시 닳고 머리에도 파손이 심하여 세부는 알 수 없는데 큼직하고 강건해 보인다. 이런 형태의 얼굴은 함양 덕전리 마애여래입상(보물 제375호)과 비슷하며 밝은 미소까지 흡사하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으며, 신체는 건장한 편으로 당당한 모습이다. 몸을 가로지르는 옷주름은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조금은 형식적으로 처리되었다. 오른팔은 굵고 우람하며, 손은 깨졌지만 손끝이 땅을 가리키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왼손도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대좌는 4각형인데 윗부분의 앞뒷면은 깨어지고 양쪽 옆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좌의 중간부분에는 눈모양의 안상(眼象)이 새겨지고 아랫부분에는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은 고려적인 불상의 힘과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걸작으로 여겨진다.
함양 벽송사 삼층석탑 : 보물 제 474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18-1
연 대 : 조선시대
벽송사는 조선 중종 15년(1520)에 벽송(碧松)이 창건한 사찰이다. 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보이고 있다. 벽송사의 창건연대가 1520년인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신라양식 탑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2단으로 구성된 기단은 아래층 기단에 가운데돌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얕게 조각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의 사이에 높직하게 딴 돌을 끼워놓은 것이다.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한 장의 널돌로 이루어졌으며 밑에는 수평으로 얇은 단을 새겼다.
탑신부의 몸돌은 각 층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추녀가 얇고 반듯하며 마무리 부분에서 치켜오른 정도가 완만하다. 하지만 지붕돌 윗부분은 경사가 급하고 치켜올림의 정도도 심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2층이 2단, 3층이 3단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 남아있다.
이 석탑은 조형예술이 발달한 신라석탑의 기본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으며 짜임새 또한 정돈되어 있는 작품으로, 조선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일반적으로 법당 앞에 탑을 두는 것과 달리 탑을 절 뒤쪽의 언덕 위에 세우고 있어 주목할 만한 점이라 할 수 있다.
함양 벽송사 목장승 :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2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18-1
연 대 :
잡귀의 출입을 금하는 기능과 함께 불법을 지키는 신장상(神將像)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2기 모두 몸통이 절반 가량 땅 속에 묻혀 있어, 드러난 높이가 2m 내외이고, 그나마 한쪽 장승은 윗부분이 불에 타 파손이 심하다.
대체로 잘 남아 있는 오른쪽 장승은 대머리에 크고 둥근 눈이 돌출되었다. 코 주위에 깊은 선을 둘러 뭉툭한 코가 더 두드러져 보이며, 꽉 다문 입 주위와 턱 아래에는 톱니 모양의 수염을 묘사해 놓았다. 몸통에는 ‘호법대신(護法大神:불법을 지키는 신)’이라는 이름을 새겨 놓았다. 머리의 일부가 불에 타버린 왼쪽 장승은 눈 한쪽과 코의 가운데 부분이 파손되었다. 남아 있는 눈은 크고 둥글며, 입은 다물고 있으며, 그 아래에 짧은 수염을 표현하였다. 몸통에는 ‘금호장군(禁護將軍:경내에 잡귀의 출입을 통제하는 장군)’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구전에 의하면 약 70년 전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목장승으로서는 시대가 오래되어 보기드문 모습이다. 비록 눈·코·입이 과장되게 표현되긴 하였으나 순박한 인상을 주고, 무서운 듯 하면서도 친근함을 느끼게 하여 질박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함양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산10
연 대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에 위치한 승안사지에 있는 불상으로 승안사지 3층 석탑에서 20m 가량 떨어진 곳의 개천 주위에 있는 불상이다. 오른팔 등에 파손이 있고, 하체가 묻혀 있으나 상체의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머리 부분은 신체와 비례가 맞지 않아 매우 어색한 느낌을 준다. 또한 선각에 가까운 띠주름식의 옷주름은 형식화되었고, 좁은 어깨, 평판적이고 직선적인 신체의 윤곽선 등은 생동감이 없다.
이러한 표현 등에서 당대 거구(巨軀) 불상에 나타난 조형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임이 분명하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