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진주 묘엄사지 삼층석탑 외 문화재탐방

소솔바람 2011. 9. 18. 17:14

진주 묘엄사지 삼층석탑 : 보물 제379호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447-1

연   대 : 고려시대

옛 절터에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아래층 기단은 현재 땅 속에 파묻혀 있어 그 구조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위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폭이 넓은 기둥이 새겨져 있다. 그 위로 기단(基壇)의 맨윗돌을 얹었으며, 한가운데 2단의 괴임을 깎아내 탑신(塔身)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층마다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지나치게 높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과 안정감을 잃었다. 몸돌에는 기단에서와 같이 폭이 넓은 모서리기둥을 새겼는데, 1층의 서쪽 면에는 창살이 있는 두 짝의 문 모양과 고리가 얇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넓이에 비하여 두꺼운 편이며, 밑면의 받침은 1·2층이 4단씩이고 3층은 3단으로 줄어서 지붕이 더욱 두껍고 경사가 급해 보인다. 처마의 선은 위아래가 모두 수평을 이루다가 네 귀퉁이 끝에서 약간 들려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기단 일부가 파묻히고 부서져 있으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고, 신라 석탑의 전형양식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뚜렷하다. 상하의 균형을 잃어 거친 느낌이며 각 부의 짜임새나 제작수법도 둔화되었다.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중기 이후로 짐작되는데 이 시기의 석탑으로는 시대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주변에 흩어진 유물들...

 

 

 

산청 사월리 석조여래좌상  : 보물 제371호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망경남동567, 1673

연   대 : 통일신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절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57년에 경남 진주의 금선암(金仙庵)으로 옮긴 것이다. 불상을 안치한 대좌(臺座)와 불상 뒤의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으나 무릎 부분을 비롯하여 많은 부분이 깨진 상태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머리에 비해서 얼굴이 지나치게 길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나 허리를 너무 잘록하게 표현하여 어색한 느낌이 드는데, 이러 불상의 모습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특징이기도 하다. 현재 무릎 부분이 깨졌기 때문인지 비례가 잘 맞지는 않지만 넓은 어깨, 당당한 가슴 등에서 박력있는 형태를 보여준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옷주름에는 형식화가 심하다. 오른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배꼽 부근에 놓인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약사여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바깥 부분이 거의 깨진 광배에는 연꽃무늬, 구름무늬, 공양 올리는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8각의 대좌에는 보살상과 신장상, 큼직한 연꽃무늬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역시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적 특징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 불상은 박력있는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귀중한 예로서 높이 평가된다.

 

진주 용암사지 승탑 : 보물 제372호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산31

연  대 : 고려시대

원래는 용암사터의 서북쪽에 있던 탑으로, 파손되었던 것을 1962년에 원래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바닥돌, 기단(基壇)의 가운데 부분, 탑신(塔身) 등이 파손되어 이 부분들을 새로 만들어 놓았다. 특히 기단의 가운뎃돌에는 구름과 용이 조각되어 있었으나 새로 보충된 것에는 간략하게 모서리기둥만 새겨 아쉬움을 주고 있다.
기단은 아랫돌 각 면에 구름무늬를 깊게 새기고 그 안에 불법을 수호하는 천부상(天部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는데 그 수법이 우수하다. 연꽃무늬를 새긴 기단의 끝부분을 지나 탑신의 지붕으로 올라가면 얇은 지붕돌 밑에 똑같은 테두리의 평평한 받침이 눈에 띈다. 지붕선의 끝은 추녀선과 만나는 곳에서 돌출된 꽃장식을 만들고 있다. 경사면은 완만하고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얇은 띠로 둘러져 있다. 머리장식부분은 석탑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구조물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다.
누구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적으로 비례가 잘 맞고 모든 부재가 8각으로 조성되어 기본형을 따르고 있다. 사리탑 주위에는 석불, 석등, 석탑의 부재가 함께 터를 지키고 있다.

 

 

진주 용암사지 석불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산31

연  대 : 고려시대

수성암의 절벽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용암사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불상으로,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은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이목구비가 단정한 타원형의 얼굴은 오른쪽 뺨이 깨졌으나 눈가에 어린 미소가 불성(佛性)을 충분히 느끼게 할 만큼 온화하다.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는데, 옷깃은 두꺼우며, 옷주름은 선으로 처리하여 신체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양식으로 두건 쓴 모습과 더불어 당시의 지장보살상의 실례로 주목되고 있다.
무릎은 비교적 넓고 높직하며, 무릎 위에 두 팔굽을 짚고 두 손을 맞잡았는데,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고 있어서 상체가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옷 속에 드러난 신체는 부푼 느낌이 들지만 탄력이나 양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용암사지 석등 일부

 

 용암사지 승탑과 석등

 

 용암사지 귀부

 

 

의령 보천사지 삼층석탑 : 보물 제373호

소재지 :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하리 797-1

연  대 : 고려시대

보천사터에 세워진 고려 전기의 탑이다. 보천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사찰로, 세운 이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 절에 빈대가 많아 살기가 힘들자 승려들이 다른 절로 떠나게 되었고 곧바로 폐사되었다고 하는데, 조선 중기 이전에 이미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보물 제472호로 지정된 의령 보천사지 승탑이 남아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얹었는데, 고려탑이긴 하나 신라의 일반적인 양식을 이어받고 있다.
탑의 바닥돌은 아래에 네 모서리마다 큰 괴임돌을 두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양 모서리와 가운데 부분에 기둥 모양을 하나씩 새겼다. 그 위의 맨윗돌은 구성이 독특한데, 두 장의 길고 판판한 돌을 좌우로 얹고 그 사이에 작은 2개의 널돌을 끼워놓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닥돌에서의 괴임돌처럼 돌이 움직이지 않도록 잡아주어 탑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배려인 듯 하다. 위층 기단은 각 면의 양쪽 모서리에만 기둥 모양을 새겼을 뿐, 가운데부분은 생략하였다.
탑신은 각 층에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여, 층층이 온화하게 크기를 줄이면서 올려놓았다. 몸돌에는 모서리에만 뚜렷하게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5단의 밑받침을 두었다. 지붕돌의 경사면은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며, 처마의 윗선은 거의 수평을 이루다가 네 귀퉁이에서 서서히 들려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쳐주는 네모난 노반(露盤)만 남아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노반 위로 불꽃조각을 한 수연(水煙)이 얹혀 있었는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전체적으로 원만한 비례를 나타내며, 기단부에서의 독특한 구성이 돋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1967년 사리유물을 도난당하는 바람에 탑이 쓰러져 많이 부서졌으나 곧 보수하였다. 이때 사리를 장치하였던 흔적이 밝혀졌는데 그 안에서 청동으로 만든 불상과 광배 모양의 구리조각, 흙으로 만든 탑 등이 발견되었다.

 

 

의령 보천사지 승탑 : 보물 제472호

소재지 :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하리 산96-1

연  대 : 고려시대

보천사는 수암사(水巖寺)라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창건되었던 사찰이다. 승탑은 절터의 북쪽 산기슭 계곡에 세워져 있고, 위아래 모두 8각형의 기본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기단의 아래받침돌·가운데받침돌·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사이에 돌띠를 돌려 구분하였으며, 윗단에는 용과 구름무늬를 얕게 돋을새김하였다. 가운데받침돌도 8각으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긴 후, 면에 타원형의 조각을 두었다. 윗받침돌에는 2겹으로 16장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탑신은 각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고 8면 가운데 한 면에만 문짝과 자물쇠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매우 두꺼운 모습으로 정상에서 각 모서리로 뻗치는 선을 높게 돋을새김하였고, 그 끝마다 큼직한 꽃장식을 얹어 놓았다.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전체적으로 각 면을 안으로 굽어 깎은 점이 특징적이며 기단의 아래받침돌에 새긴 용과 구름무늬가 무기력해 보이는 흠이 있다. 또한 지붕돌이 무겁고 두꺼운 점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볼 수 있어 승탑이 건립된 시기는 고려 전기로 짐작된다.

 

합천 백암리 석등 : 보물 제381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 90-3

연  대 : 통일신라

석등이 세워져 있는 곳은 백암사 또는 대동사터라고 전하여 오나 분명하지 않으며, 이 석등도 무너져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여덟 장의 잎이 달린 연꽃을 조각한 둥근 아래받침돌 위에 아무런 새김이 없는 8각의 긴 가운데기둥을 세워 신라석등의 경쾌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 위로 꽃봉오리같은 윗받침돌은 안에 얕은 홈을 파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은 창을 내고 4면은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매우 뛰어난 수법으로 도드라지게 새겼다. 화사석은 불을 밝혀두던 공간으로 불빛이 있던 옛모습을 떠올리면 흥미롭다.
지붕돌은 밑면에 1단의 받침이 있으며, 그 안쪽으로는 홈을 파서 화사석을 끼워 고정시키도록 되어 있다. 지붕돌의 경사면은 얇지만 뚜렷하게 각을 지어 신라시대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귀퉁이에는 꽃조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깨어져 그 흔적만 남아있다. 꼭대기에는 8잎의 연꽃 문양조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을 화사하게 장식하였고, 특히 화사석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과 사천왕상의 배치 등은 주목되는 수법이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 후반의 우수한 석등이라 할 수 있다.

 

 

 

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 101

연  대 : 통일신라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의 대동사 절터에 있는 불상으로 8각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으며 얼굴 부분의 마멸이 심하지만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이 솟아 있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가슴은 넓게 트여 있고, 상체에서부터 흘러내린 옷주름은 무릎을 감싸고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있는 모습으로 땅속의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대좌는 상·중·하대를 갖추고 있는데, 상대에는 연꽃이 핀 모양을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을 조각하였다. 중대의 8면에는 각각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있는 신장상(神將像)을 새겨 넣었다.
근처에 있는 석등의 양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