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

경상감영공원에서 3.1운동 계단을 올라.....

소솔바람 2011. 7. 16. 14:30

7월 중순.... 초복은 지나고 장마가 끝나갈 무렵 ,대구의 날씨는 후덥지근 흐리기만하고 .모처럼 70년대 학창시절 즐겨다녔던 중앙로와 경상 감영공원을 한바퀴돌아 3.1운동길 90계단을 올라본다. 토요일...중앙로 거리는 한적 하기만하고...분위기는 70년대 에 멈춰버린 도로의 모습들....여기가 대구의 중심지 중앙로이다..

 

향촌동 구두골목을 지나 경상감영공원으로 향한다... 70년대에는 '중앙공원'으로 불렀다.

 

경상 감영공원

 

 

징청각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21

연   대 : 조선시대

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이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8칸·옆면 4칸으로 넓이가 무려 227㎡나 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징청각은 선화당과 함께 대구시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아건물로 중요한 문화재이다.

선화당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21

연   대 : 조선시대

선화당은 경상도 관찰사가 공적인 일을 하던 건물로 원래 안동에 있던 것을 조선 선조 34년(1601)에 김신원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 뒤 현종 11년(1670), 영조 6년(1730), 순조 6년(1806) 3차례에 걸친 화재로 타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7년에 윤광안이 다시 지은 것이다. 그 후 경상북도 도청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 도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1970년 중앙공원을 만들면서 현 모습으로 고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청건물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자료이며, 경상감영의 상징이 되는 건물이라는 데 가치가 있다.

"시민의 나무" 조형물

 

계산동성당 : 사적 제290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71

연   대 : 대한제국시대

1886년 로베트(Robert.A.P) 신부가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1897년에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에 있던 초가집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899년에 한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지었으나, 다음 해에 화재로 불 타 1902년에 현재의 성당을 짓게 되었다.
설계는 로베트 신부가 하고 중국인이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에서는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입구에 두 개의 종각에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당건축은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3.1운동길 (90계단)

대구고보 학생 과 신명여학교 학생들이 일본 순사를 피하여 이길을 지나 3.1만세 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선교사 챔니스의 주택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424

연   대 : 일제강점기

선교사 Reiner가 살던 집으로 191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Reiner 후로 Chamness, Sawtell 등의 선교사가 살았고, (1984~1993)까지는 동산병원 의료원장인 H.F Moffett가 거주 하였었다. 현재는 의료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남북으로 뻗은 긴 네모형으로 1층 내부에는 거실·서재·부엌·식당·계단 등이 있고, 2층에는 2개의 침실이 있다. 외부에는 나무로 된 현관과 베란다를 설치했으며, 지붕에는 2개의 붉은 벽돌로 된 굴뚝이 솟아있다.
당시 우리나라에 거주했던 미국인의 건축·주거·생활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건물이다.

선교사 블레어의 주택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424

연   대 : 일제강점기

선교사인 블레어(Blair)와 라이스(Rice)가 살던 집으로 1910년경에 지어진 건물이다. 현재는 교육·역사 박물관으로 사용 되고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2층집이며, 남북방향으로 긴 형태이고 안의 건축재료를 일부분 바꾼 것 이외에는 건물의 형태와 구조는 잘 남아 있다. 지붕 위엔 붉은 벽돌로 된 굴뚝이 있고 건물 안의 바닥은 나무로 된 마루바닥이다. 1층에는 베란다·응접실·거실·침실·식당·부엌이 있고, 계단으로 연결된 2층에는 침실·욕실 등이 있다. 창문은 위 아래로 열 수 있게 되었으며, 현관의 베란다 윗부분에는 일광욕실이 있다.
선교사 블레어 주택은 당시 미국의 주택모습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건물이다.

은혜정원

우리가 어둡고 가난할 때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국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여기에 고이 잠들어 있다.

 

동무생각 (思友)

중학교 음악책에 실렸던 동무생각의 노래비이다..이곳이 담쟁이 덩굴이 휘감겨 있던 청라언덕 이란다.

청라언덕을 내려오면서 어느주택 담벼락에 핀 "능소화"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

이 고택은 친구들과 제자들을 맞이하던 사랑방. 울적한 마음을 달래던 감나우.마당.안방등 시인 상화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있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

대구의 유명한 약령시 (약전골목)

대구 제일교회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50

연   대 : 대한제국시대

경북지방에 처음 생긴 기독교회로, 선교사들이 이 지방을 개화시키기 위해 근대적 의료 및 교육을 전개했던 곳이다.
고종 32(1895) 부산에 있었던 북장로교 선교본부가 대구로 옮겨지고, 광무 2년(1898)에 기와집 4동을 교회당으로 사용하였다. 계속해서 신도가 늘어 1908년에 재래양식과 서구 건축양식을 합작시킨 새로운 교회당을 지었다. 1933년 신도들의 헌금과 중앙교회의 성금으로 교회당을 새로 짓고 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1937년에 이주열 권사가 높이 33m의 종탑을 세웠고, 1969년에 내부공사를 하고 1981년에 건물 뒤에 156평의 성전을 늘렸다.
현재 이 건물의 전체적인 양상은 평면이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이고, 앞면 중앙에 현관을 두고 오른쪽에는 종탑을 세운 간결한 고딕 건물이다. 1층은 사무실·유치원·청소년 예배실로 사용하고, 2층은 전체를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다.
대구 제일교회는 대구의 수 많은 교회 건물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고, 기독교가 근대화에 기여한 상징물로서 근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