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법주사 문화재(2)

소솔바람 2011. 5. 24. 12:07

법주사 : 사적 제503 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209

법주사에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과 기발한 착상과 원숙한 조각솜씨로 조각한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한국 제일의 석연지(국보 제64호),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대웅전(보물 제915호), 원통전(보물 제916호), 신법천문도(보물 제848호) 등과 충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여러 문화재가 있어 신앙유적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법주사 괘불탱 : 보물 제 1259  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209

연  대 : 조선시대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열 때 쓰이는 대형불화를 말하며, 이 불화는 보살 형태의 단독상을 화면 전체에 꽉 차게 그려 넣은 것이다.
보살상은 양 손으로 꽃가지를 받치고 서 있는 모습으로 상체를 크게 묘사한 반면 하체는 짧게 나타냈다. 머리에는 산(山) 모양의 화려한 장식이 달린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네모진 얼굴을 하고 있다. 양쪽 어깨를 감싼 옷은 다양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여 큼직하게 그렸다.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 구름무늬 등을 그려 공간을 채우고 있는데 옷의 화려한 무늬들과 어우러져 부처님 세계의 정경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광배 위쪽으로는 구름이 감싸고 있고 화면의 가장 윗부분은 흰 광선이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걸쳐져 있다.
전체적인 비례가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묵중하고 중후한 느낌을 보여주며 다양한 문양과 장식, 밝고 선명한 원색과 중간색을 적절히 사용하여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참여한 많은 인물들과 함께 법주사 창건 배경과 당시의 불교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글이 남아 있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품이다.

 

 법주사 대웅보전 : 보물 제 915  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209

연  대 : 조선시대

 대웅전은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내부에 모신 삼존불은 벽암이 다시 지을 때 조성한 것으로 가운데에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이 건물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불전(佛典) 중 하나이다.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 보물 제 1361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209

연  대 : 조선시대

법주사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관음보살좌상이다.
머리에는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는데, 관의 가운데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배 부분에는 복갑(腹甲)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부드러운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양어깨를 덮은 천의 자락 역시 신체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표현함으로써 부피감 있는 곡선미를 보여주고 있다.
불상 안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서 불상조성기가 발견되어 순치 2년, 즉 165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단하고 단순·소박하지만 부피감이 있는 이 목조관음보살상은 임란후 제작된 조선후기 불상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법주사 석연지 : 국보 제 64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209

연  대 : 통일신라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이 석연지(石蓮池)가 보인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며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연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절제된 화려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연지의 대표작이라 불리울 만하다.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 보물 제 216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209

연  대 : 고려시대

 법주사 경내에 있는 마애여래의상은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옆 바위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불상의 머리는 바위에 새긴 것들에서는 보기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하게 새겼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에는 크고 긴 코와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과 함께 두꺼운 입술이 잘 표현되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여기에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이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반듯하면서 넓은데 비해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면을 보여준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친 형태로 가슴에서 다리 사이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엄지와 맞대었다. 왼손은 앞에서 수평으로 들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이 불상은 화사한 연꽃 위에 걸터 앉고 큼직한 연꽃잎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어,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불상의 오른쪽 바위 면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 앉은 소를 새겨 놓았다. 이것은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 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는 전설을 그렸다고 하는 법주사 창건 설화와 관계되는 암각화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 보물 제 1360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209

연  대 : 조선시대

 법주사에 모셔져 있는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미타불상, 오른쪽에 석가여래상을 배치한 삼불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비로자나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건장하면서 굴곡이 없는 평판적인 몸체와 무릎을 하여 괴체적인 느낌을 준다. 왼손은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어깨를 모두 덮은 옷은 대의 자락이 팔목에서 대칭되게 흘러내려 장식적이다.
아미타불상은 본존불과 거의 동일한 유형의 불상으로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다.
석가여래상은 비로자나불상·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체형, 얼굴 모습 등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한편 아미타불상과 석가여래불상은 손모양과 불상의 성격이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옷 차림법이 마치 판에 박은 듯한 양식 특징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장대한 체구에 비하여 동안이며, 옷주름을 두텁게 표현한 이 불상은, 조형성이 탄탄하여 임진왜란 후의 새로운 조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불상 안에 넣어둔 유물들이 대부분 도난당했으나 남아있는 연기문(緣起文)에 의하면, 조선 인조 4년(1626)에 조성되었으며, 그 후로부터 121년이 지난 조선 영조 23년(1747)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어 조선후기 초반의 불상연구에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비로자나불상

 아미타불상

 

 석가여래상

 

 법주사 쌍사자석등 : 국보 제 5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209

연  대 : 통일신라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금강골 쌍탑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200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연  대 :

속리산 금강골 절터의 동쪽 암반 위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탑으로, 무너져 있던 것을 1997년에 복원해 놓았다.
서로 같은 양식을 하고 있어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을 이루는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에는 모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특히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겨 놓았다. 탑신의 각 몸돌에도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경쾌하게 치켜올라 갔으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50m아래 계곡에 옛 암자터가 있는데 그 곳에서 발견된 기와조각들이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것이고, 탑의 각 부분에 새긴 조각을 보아도 이 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 사천왕석등 : 보물 제 15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209

연  대 : 통일신라

법주사 팔상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석등이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아래받침돌은 면마다 안상을 얕게 새기고, 그 윗면은 가운데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윗받침돌과 대칭되게 연꽃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대체로 각 부분의 양식이 정제되어 있고 조각수법이 우수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시기는 신라 불교미술이 꽃피워진 8세기 중기 이후로 짐작된다.

법주사 능인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209

연  대 :

능인전(能仁殿)은 법주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앞에 조성된 건물로서 조선 인조 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법주사 중건시 벽암대사(碧巖大師)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하며,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연대 미상의 16나한(羅漢)이 모셔져 있다.
조선후기 호영(呼映)스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법주사전경도」에는 사리각(舍利閣)이라 표기되어 있어 이 전각이 원래 사리탑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이곳이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다면 통도사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불상이 조성되지 않아도 되며, 또한 이곳이 16나한을 모신 나한전(羅漢殿)이라면 그곳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羅佛)이 아닌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하는 16나한의 상이 모셔져 있어 현재로서는 건물 당초의 성격을 추정할 수 없다.
‘능인(能仁)’이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별칭 중 하나로 ‘능히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하며, 능히 사바세계(온갖 괴로움을 참아 견뎌야 한다는 뜻에서 감인(堪忍)세계라 말하기도 한다)의 온갖 괴로움을 참아낼 뿐 아니라 그 괴로움 속의 중생들을 견뎌낼 분이라는 뜻에서 능인(能忍)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교화력을 갖춘 분, 곧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곳 건물 안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에 능인전(能仁殿)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로 이익공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규모는 29.32㎡이다. 건물의 뒤편에는 법주사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이 있으며 건물의 전면 담장 밖에는 법주사 석조(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가 옮겨져 있다.

복천암 수암화상탑 : 보물 제1416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산1-1

연  대 : 조선시대

법주사 복천암 동쪽 약 200m 지점에 구축된 평평한 대지에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과 나란히 건립되어 있는데 옥개석은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에 비하여 간략한 편이나 세부 수법은 두 탑이 비슷하다. 이 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秀庵和尙塔(수암화상탑)'이라 하였고, 중대석에 '成化十六年 八月日立(성화십육년팔월일립)'이라고 2행의 명문이 음각되어 탑의 주인공과 조성년대를 알게 하는 점이다. 즉 성종 11년(1480)에 조성되었으며, 수암화상은 복천암과 관계된 조선초기의 고승으로 짐작된다.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은 고려시대 팔각원당형탑의 양식을 계승한 조선시대 초기의 탑으로서 조형수법이 뛰어나며, 특히 주인공의 존명과 조성년대를 탑에 직접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 탑의 절대년대를 알 수 있는 기준작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복천암 학조화상탑 : 보물 제1418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산1-1

연  대 : 조선시대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은 법주사 복천암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탑이다. 이 탑은 주인공의 존명과 건립년대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탑의 형태는 팔각원당형의 고려 탑을 계승하고 있으나 탑신이 구형(球形)인 점이 크게 다르다. 팔각 중대석 두 면에 걸쳐 '正德九年 甲戌五月 日立(정덕구년 갑술오월 일립)'그리고 '學祖燈谷 和尙塔(학조등곡 화상탑)'이란 명문이 있어 조선 중종9년(1514)의 건립임을 알게 한다.
학조화상은 성종 19년(1488)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를 중수하였고, 연산군 6년(1500)에는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 3부를 인행하여 발문을 짓는 등 조선전기에 활동한 고승이다.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은 건립년대와 주인공의 존명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시대 탑은 탑비가 부족하여 절대년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희귀하나 이 탑은 고려 탑을 계승한 조선초기 탑양식을 알게 함과 동시에 다른 탑의 기준작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속리산 정이품송 : 천연기념물 제 103호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상판리241

연  대 :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살아오는 동안 각종 재해를 입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 방충망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소나무는 원래 삿갓 또는 우산을 편 모양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그 모습이 많이 상하였다.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크고 오래된 나무이어서 생물학 및 생물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고, 임금에게 섬기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문화적인 가치 또한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