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
도동서원 : 사적 제488호
소 재 지 :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35번지
연 대 : 조선시대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도동서원은 문경공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원년(1568) 처음 세워 쌍계서원이라 불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선조 37년(1604) 지금 있는 자리에 사당을 다시 지었고 선조 40년(1607)에 임금님이 직접 도동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8년(1871)의 서원철폐령의 대상에서 제외된 47개 서원가운데 하나이다.
도동서원은 1605년(선조38)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있다.
도동서원 강당사당부장원 : 보물 제350호
소재지 :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35번지
연 대 : 조선시대
행사와 교육의 중심 건물인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있다. 좌우 끝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고 그 앞면엔 각각 작은 툇마루를 두었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 툇마루와 통하도록 해 놓았다.
제사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김굉필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지붕과 공포를 쌓은 양식은 강당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이다. 앞면 3칸에는 각각 2짝씩 널문을 달았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맞담으로 구성하여 매우 아름답다.
간결하고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 중기 서원 건축물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중정당
거인재
거의재
환주문
수월루
김굉필에 관하여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사용(司勇) 유(紐)의 아들. 한양(漢陽) 출신.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소학 小學≫을 배웠고, 이를 계기로≪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일컬었다.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가 후에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었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사(賜死)되었다. 유배 중에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 등의 학자를 길러내어 영남 사림의 학통이 중부지방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였다.
또, 그에게서의 시문이란 여기(餘技)에 지나지 않아 시를 지으면서 마음가짐을 되돌아보고자 했을 따름이었고, 작품으로 평가를 얻는 데에 관심을 두지 않아 ≪동문선 東文選≫에도 칠절(七絶) 2수만이 전할 뿐이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追贈)되었고, 광해군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아산(牙山)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瑞興)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한훤당집 寒暄堂集≫․≪가범 家範≫․≪경현록 景賢錄≫이 있고, ≪청구영언 靑丘永言≫에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
김굉필의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