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국립 중앙박물관(2)

소솔바람 2011. 2. 27. 19:53

옛 보신각 동종 : 보물 제2호

소재지 : 국립 중앙박물관

연   대 : 조선시대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서울 홍제동 오층석탑 : 보물 제166호

소재지 : 국립 중앙박물관

연   대 : 고려시대

사현사의 옛터에 있던 탑으로, 시가지 확장을 하면서 1970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탑은 자연석이 기단(基壇)을 대신하여 5층의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있다. 1층 몸돌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2층 이상은 기둥모양을 새겨 한 면을 둘로 나누고 그곳에 문짝으로 보이는 네모난 액자형을 표시하였다. 각 층의 몸돌은 전체적으로 위가 좁고 아래는 넓어 목조건축을 모방하려 한 의도가 엿보인다. 지붕돌은 넓고 얇은 편이나 육중해 보이고, 두꺼워 보이는 처마는 수평으로 펼쳐지다가 양끝으로 치켜오르면서 더욱 두꺼워졌다.
현재 기단부가 결실되어 안정감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전체적으로 중후하면서 경쾌함과 안정성을 겸하고 있다. 세워진 연대에 대해서는 칠장사혜소국사비(보물 제488호)의 비문에 의하여 이 절이 고려 정종 12년(1045)에 창건된 것임을 알 수 있어서, 이 탑도 절을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 : 보물 제190호

소재지 : 국립 중앙박물관

연   대 : 고려시대

거돈사터에 남아 있던 고려 전기의 승려 원공국사의 사리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사람의 집에 소장되고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현재 탑은 바닥돌이 없이 바로 기단(基壇)이 시작되고 있다. 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부분이 8각으로,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긴 후, 그 안에 꽃 모양의 무늬를 두었다.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안상 안에 8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윗받침돌에는 활짝 핀 연꽃잎을 2중으로 돌려 새겼다. 8각을 이루고 있는 탑신(塔身)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여덟 곳의 기둥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앞뒤 양면에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좌우 양 면에는 창문 모양을, 그리고 남은 네 면에는 4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새겼다. 지붕돌 역시 8각으로 몸돌과 닿는 곳에 4단의 받침을 표현하고, 그 위에 서까래를 모방하여 새겼다. 처마는 얇고, 여덟 귀퉁이에는 치켜올림이 뚜렷하며, 낙수면에 새겨진 기와골 조각은 처마에 이르러 막새기와의 모양까지 표현해 놓아 목조 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다. 꼭대기에는 8각형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다.
탑비의 건립은 ‘태평을축추칠월(太平乙丑秋七月)’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 현종 16년(1025)에 해당하므로 이 사리탑도 그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8각 사리탑으로, 모양이 단정하고 아담한 통일신라 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조형의 비례가 좋고 중후한 품격을 풍기며, 전체에 흐르는 조각이 장엄하여 한층 화려하게 보인다.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 보물 제282호

소재지 : 국립 중앙박물관

연   대 : 고려시대

고달사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높이는 2.43m이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까지만 남아있었으나, 2000년에 경기도 기전매장문화연구원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었다.
직사각형의 바닥돌 4면에 둥글넓적한 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아래받침돌 대신 2마리의 사자를 앉혀 놓았다. 사자는 좌우에서 앞발을 내밀고 웅크리고 있으며, 등 위로 구름이 솟아올라있다.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돋을새김하였고,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그 위에 놓인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뚫었다.
우리나라 쌍사자석등의 사자는 서있는 자세가 대부분인데, 이 석등은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특징적이며,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 보물 제358호

소재지 : 국립 중앙박물관

연   대 : 고려시대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제존자의 사리탑으로, 모두 2기이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세워졌는데, 보통 승려의 사리탑과는 달리 석탑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보제존자(1320∼1376)는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으로, 신륵사에 그의 사리탑이 남아 있으나 제자들에 의해 영전사에도 따로 사리탑을 세운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위·아래층 모두 모서리에 기둥조각을 새겼고, 위층 기단 윗면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웠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다. 2기 가운데 1기의 1층 지붕돌은 양식상 차이가 있어 원래 이 탑에 속하였던 것인지 의심스럽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2기 모두 완전하게 남아있지는 않다.
고려 우왕 14년(1388)에 세운 것으로, 승려의 묘탑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이며, 더욱이 거의 같은 양식으로 2기를 건립하였다는 점도 특이한 예이다. 탑을 지금의 자리로 옮길 당시에 각각의 탑에서 사리를 두는 장치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한 탑에서는 죽은사람에 관해 새긴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이 탑을 세우게 된 과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훌륭하고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보물 제360호

소재지 : 국립 중앙박물관

연   대 : 통일신라

충청북도 제천군 한수면 동창리 월광사터에 전해오던 탑비로, 1922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원랑선사(?∼866)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원랑선사는 문성왕 18년(856) 당나라에 유학하여 11년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 귀국한 뒤 월광사에 머물렀다. 68세로 입적하자 헌강왕이 ‘대보광선(大寶光禪)’이라는 탑명을 내려, 김영에게 비에 새길 글을 짓게 하였다. 글씨는 구양순체의 해서체로 순몽이 쓴 것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은 네 발이 몹시 작고 짧은 목과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에 나타나는 형식화된 조형이다. 머릿돌에 새긴 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다.
전체적으로 탑비의 머리·몸·받침 각 부분의 비례감이 훌륭한 비로서, 단아하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준다. 탑비는 원랑선사가 돌아가신 후 진성여왕 4년(890)에 세워졌다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 보물 제361호

소재지 : 국립 중앙박물관

연   대 : 조선시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대경대사의 탑비로, 보리사터에서 발견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대경대사는 9세에 출가하여 교종을 배웠으나, 나중에는 선(禪)을 연구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고려 태조는 그를 존중하여 보리사의 주지로 머물게 하였다. 69세에 이 절에서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대경’, 탑 이름을 ‘현기’라고 내렸다.
비는 여의주를 물고 일어선 납작한 돌거북 받침과, 거대한 비머리돌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해 균형을 잃고 있다. 그러나 머릿돌에 새겨진 구름과 용의 무늬가 매우 힘차게 조각되어 눈여겨볼 만하다.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공적 등이 새겨져 있는데, 당시의 문장가였던 최언위가 글을 짓고, 이환추가 글씨를 썼으며, 대사의 제자인 최문윤이 글씨를 새겼다. 글씨에는 획의 모서리를 날카롭게 살린데서 오는 강인함이 묻어나는데, 고려 전기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는 부분이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태조 22년(939)으로,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 : 보물 제362호

소재지 : 국립 중앙박물관

연   대 : 통일신라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진경대사의 사리탑으로, 탑비와 함께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1919년 경복궁으로 옮긴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전형적인 8각 부도이지만 표면의 조각은 적은 편이어서 재료의 빛깔과 아울러 청초한 느낌을 준다.
8각의 바닥돌 위에 있는 기단(基壇)의 아래받침돌 또한 8각으로, 옆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무늬의 바닥선이 불꽃모양으로 솟아올라 시대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북모양으로 중앙의 곳곳에 꽃송이를 새긴 후 이를 도드라진 띠장식으로 연결시켰다. 윗받침돌에는 연꽃 8송이를 조각하였다. 탑신(塔身)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지붕돌은 높고 큰 편으로 처마는 수평을 이루고 있다. 낙수면은 8각의 굵직한 지붕선이 꼭대기에서 아래로 이르렀으나, 끝에 달려있던 꽃장식은 모두 부서졌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와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있는데, 한 돌로 조각하였다.
만들어진 때는 진경대사가 입적한 해인 신라 경명왕 7년(923)으로 추정되는데, 아래받침돌의 안상에서 이미 고려시대의 특색이 보이고 있다. 기단 가운데받침돌이 낮고 작은 것이나 탑신의 몸돌이 가늘고 긴 것에 비해, 지붕돌이 지나치게 커서 비례의 균형을 잃고 있다. 조각수법이 강하지 않고 전체 형태가 길쭉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 등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나주 서문 석등 : 보물 제364호

소재지 : 국립 중앙박물관

연   대 : 고려시대

본래 전라남도 나주읍 서문 안에 있던 것을 192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네모난 모양의 널찍한 바닥돌 위에 세워져 있으며, 아래받침돌은 8각이고 연꽃문양이 새겨져 있다. 기둥모양의 중간받침은 8면으로 각 면마다 테를 둘러 공간을 만들고 그 중심 안에 한 줄씩의 문장을 새겼다. 윗받침돌은 8각면에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조각했고, 화사석은 새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창이 4개다. 지붕돌은 매우 장식적으로 8개 면마다 처마 끝에 짧은 막을 드리운 것처럼 세로줄무늬가 있고, 그 위로 막 피어오르는 형상의 꽃장식이 두툼하게 달려 있다. 지붕돌 위로는 마치 지붕을 축소해 놓은 듯한 돌이 올려져 있고, 맨 꼭대기에 올려진 연꽃봉오리모양의 돌은 석등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든 것이다.
받침에 새겨져 있는 기록을 통해 고려 선종 10년(1093)에 석등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 : 보물 제365호

소재지 : 국립 중앙박물관

연   대 : 고려시대

진공대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과, 그 옆에 놓여있는 돌로 만든 함이다.
원래는 강원도 원주의 흥법사터에 있었으나 1931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진공대사는 통일신라말 ·고려초에 활약한 승려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 신덕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특히 고려 태조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형태로, 기단(基壇)의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 표면에는 웅장한 구름과 함께 뒤엉켜 있는 용의 몸체를 생동감있게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독특하고, 앞뒤 양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이 각각 새겨져 있다. 그 위로 얹혀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과 2중으로 된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다. 경사가 완만한 낙수면은 8각의 모서리선이 굵게 새겨져 그 끝에는 높이 솟아있는 꽃조각이 달려있다. 특히 낙수면에는 기와를 입힌 모양의 기왓골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처마 끝에 이르러서는 암막새, 수막새까지도 자세히 조각됨으로써 밑면의 서까래와 함께 당시 목조건축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8각의 작은 지붕모양의 머리장식인 보개(寶蓋)가 있다.
한편 탑의 왼쪽에 따로 놓여 있는 돌로 만든 함에는 불교경전과 함께 관련된 유물을 담아두었는데, 뚜껑까지 완전하게 남아있어 그 가치를 지닌다. 지붕의 윗부분을 수평으로 자른 듯한 뚜껑돌과 긴 상자 모양의 몸통으로 이루어진 이 함은 거의 완전하며 온화한 품위를 보여주고 있다. 두 유물의 조성연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고려사』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태조 23년(940)으로 추측된다.

강민첨 초상 : 보물 제588호

소재지 : 국립 중앙박물관

연   대 : 조선시대

고려시대 장군인 강민첨을 그린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61.3㎝, 세로 80㎝이다. 강민첨(?∼1021)은 고려시대 명장으로 목종(재위 997∼1009)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현종 3년(1012) 동여진이 침입하자 안찰사로서 군대를 이끌고 나가 격퇴하였고 현종 9년(1018) 거란이 침입하자 이를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 쓰던 모자인 복두에 정장을 하고 홀(笏)을 들고 앉아서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반신상이다. 의자 등받이에 있는 호랑이 가죽은 18세기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고려시대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정조 12년(1788) 박춘빈이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린 그림이다. 비록 조선시대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고려시대 초상화가 희귀한 상황에서 고려 공신상 형식과 표현형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