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2)...

소솔바람 2010. 10. 28. 13:49

불상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만드는데, 하나는 소조불 (흙을 구워 만든불상)처럼 재료를 덧붙여가면서 만드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재료를 깎아 만드는 방법으로, 목불과 석불이 그 예이다. 우리나라에는 돌로 만든 탑도 많지만 돌로 만든 불상도 많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에도 돌로 만든 불상이 많다. 왜 불상을 돌로 만들었을까? 흙이나 나무로 만든 불상은 내구성이 취약하다는 단점이있다.금동불은 일정한 크기 이상으로는 만들지 못하고, 비용도 상당히 들기 때문에 왕실과 귀족이 아니고서야 엄두도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오래 남을 수 있는 큰 불상을 경제적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한 불상의 재료로 적합한 것이 바로 돌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석불은 인도나 중국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인도, 중국 사람과 다른 미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돌이 달랐기 때문이다. 인도나 중국에서 석불의 재료는 무른 대리석이나 사암인 반면에, 우리나라 석불의 재료는 단단한 화강암으로 화강암을 조각할 때에는 대리석이나 사암을 조각하는것과 달리 조각칼을 사용할 수 없고 정과 망치만 사용해야 했다.따라서 조각하기가 무척 어려웠고, 표현된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1965년 경주 분황사를 발굴할 때, 절 안에 있는 우물 속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석불들이 나왔다. 그런데 한결같이 머리가 잘려진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불상의 머리는 왜 없어진 걸까? 그 원인으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의해서 받침대 위에 있던 불상이 굴러 떨어져 가장 약한 부분인 목이 부러지기 쉽다. 또 몽고군의 침입, 왜란,호란과 같은 전란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한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일부러 불상을 훼손한 적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간혹 땀을 흘리는 불상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유생들은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간주하여 불상을 파괴하였다.

 

 

 

 

부처 (Buddha)는 "깨달은자"를 의미한다. 부처를 부르는 말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여래(如來)라는 말이 있는데 여래는 "진리의 제현자,열반에 다다른자" 라는뜻이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는 지금부터 2,500여 년 전 인도에서 왕자로 태어나 출가하여 진리 탐구와 수행을 통해 보드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실존 인물이다.

 

비로자나불

진리의 빛이 우주에 가득 비치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 비로자나불이다. 화엄신앙의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를 뜻하는 법신불이기 때문에 형상화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7세기 경 중국에서 불상으로 만들어 졌다. 신라인들은 보관을 쓴 중국의 비로자나불 대신, 여래의 모습에 지권인을 맺은 비로자나불을 창안 하였다.

 

아미타불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정토에 가게 하는 부처이다. 광명의 덕이 널리 비추어 중생에게 한없는 이익을 준다고 하여 무량광불로 불렸으며, 도교의 불로장생 신앙과 결부되어 무량수불이라고도 하였다.

 

약사불

약사불은 모든 질병뿐만 아니라 무지의 병까지도 고쳐주는 부처로서 대의왕불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부처는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어 쉽게 알 수 있다.

 

 

승소골 삼층석탑 : 경주 남산 승소골 출토

연대 : 통일신라 9세기 후반

경주 남산 동쪽 기슭 송소골에 있던 탑으로, 이 탑은 규모가 작아지고 지붕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등 9세기 탑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에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조각이 있다.위층 기단에는 상다리무늬(안상)

조각이 있다. 그리고 1층 몸돌에는 상다리 무늬 안에 사천왕을 새겼다. 사천왕은 원래 인도 토속신인데, 불교 성립 이후 부처님과 부처님의 말씀을 동서남북에서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이 탑에 새겨진 사천왕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사리가 모셔진 탑을 지키려던 신라인들의 염원이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조불두(石造佛頭): 경주남산 철와골 출토

연대 : 통일신라 8세기말 ~ 9세기초

 이 부처 머리는 한 차례 큰 태풍이 지나간 후  경주 남산 철와골에서 발견되었으며,1959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머리크기가 1.53미터에 이르고 그 무게가 1.7톤이나 나간다.만약 부처가 온전 했다면, 얼마나 컸을까? 그 높이를 추정하는데

 경주 남산 열암골에서 발견된 마애불이 좋은 비교자료이다. 이 열암골 불상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4.6미터인데 이 중 머리 크기가 1/4을 차지 한다고 한다.

 

 

석조 관음보살입상 : 경주남산 출토

연대 : 통일신라 8 ~9세기

 

 

석조 불 입상 : 경주 장항리 출토

연대 : 통일신라 8세기

경주 양북면 장항리의 한 절터에 흩어져 있던것을 복원 한 것이다. 장항리 절터에는 오층석탑2기와 불상좌대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불상은 하반신이 없는데도 서 있는 불상이라고 부르는 근거는 불상대좌에 불상을 세우기 위한 촉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 크기는 대략 4.8미터로 예날 척도로는 1장6척에 달하는 매우 큰 불상 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