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 박물관에서...(1)
지난,10월 셋째주 토요일 경주로 향했다.천년신라의 수도 "서라벌"...도무지 어디서 부터 탐방을 해야 할 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시내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문화재...일단.분황사를 탐방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정문에서 입장권을 무료로 배부받은후 숭복사 쌍거북 받침이 전시되어있는 야외 전시장부터 둘러 보기로 했다..
국립경주박물관 정문
돌의 영원한 생명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돌에 글자를 새겨 비석 주인공의 행적이 훗날까지 길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다. 또한, 비석을 좀더 아름답게 꾸며 주인공의 삶과 업적이 더욱 빛나기를 기원하였다.
광개토왕비나 진흥왕순수비와 같은 삼국시대 비석들은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크지만,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비석을 아름답게 꾸미기 시작한 것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재위654~661)때 부터이다. 신라사람들은 삼국을 통일한
왕의 업적이 더욱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비석을 꾸몄을 것이다.
통일신라 후기가 되면 화려하게 장엄한 비석은 절에도 세워지는데, 특히 선종사찰에 많이 세운다. 선종은 스승의 법통을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스승은 왕보다도 더욱 존귀한 존재였을 것이다. 스승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는 마음으로 비석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게 된다. 이러한 승려들의 비석은 승탑(부도)과 함께 세워져 탑비라고 부른다.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경주 숭복사터 출토
연대 : 통일신라 9~10세기
두 마리 거북이 붙어 있는 이 비석받침은 경주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 터에 있던 것이다.[삼국유사]에는 원성왕(재위785~798)
의 능은 토함산 서쪽 골짜기 곡사(鵠寺(숭복사)에 있는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라는 것과 그 곳에 있던 비문을 최치원이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자.공작무늬돌
경주출토. 통일신라8~9세기
기다란 화강암에 한쪽 면을 편평하게 다듬은뒤, 오른쪽으로 치우쳐 크고 작은 세 개의 원을 붙여 새겼다. 맨 오른쪽 제일 작은 원 안에는 사자가 커다란 잎이 달린 나무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가운데 원에는 둘레에 구슬무늬 띠를 돌리고, 그 안에 나무 한 그루를 사이에 둔 공작 두 마리를 대칭으로 배치하였는데, 마치 먹이를 쪼는 듯 하다. 가장 큰 원은 둘레에 구슬무늬 띠만 돌려져 있을뿐 원안에는 아무 조각도 하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다. 이것을 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만 원 외곽의의 구슬무늬 띠와 대칭을 이루는 새 무늬 등으로 미루어 보아, 서역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할 따름이다.
佛法의 수호자,四天王.八部衆
지극히 청정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그 전에 통과해야할 문이 있다. 이 가운데 눈을 부릅뜨고 칼날조차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갑옷에 칼이며 창을 들고 악귀를 밟고 있는데 네명의 신장이 서있는 곳을 天王門, 혹은 사천왕문 이라고 한다.
사천왕은 부처님이 계신곳, 부처님의 말씀을 세상의 악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신장으로 이 사천왕 외에도 팔부중,금강역사,십이지신등이 있다.
사천왕은 원래 고대 인도에서 귀신의 무리의 왕이었다가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 존재이다. 불교의 세계인 수미산의 중간쯤 동서남북에 상주하는데, 동쪽은 지국천왕이,서쪽은 광목천왕이,남쪽은 중장천왕이,북쪽은 다문천왕이 머물면서 불법을 수호한다고 한다.사천왕의 모습이나 지니고 있는 무기들은 일정하지 않으나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만은 항상 탑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팔부중 역시 사천왕과 마찬가지로 위로는 불법을 수호하고, 아래로는 대중을 교화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무장한 모습을 띠게 되었지만, 그 자세나 지물등은 정형화되지 않고 지역의 특성에 맞게 표현 되었다. 팔부중은 두 종류가 있는데 부처를 수호하는 불타팔부중과 사천왕의 권속인 사천왕팔부중으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불타팔부중이 조성되는데, 바로 天,龍,夜叉,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등이다.
석 조 : 경주 흥륜사터 출토
연 대 : 통일신라 8~9세기
석조는 장방형 또는 원형의 돌 내부를 파내어, 절 등에서 물을 담았던 것이다. 이석조에는 많은 글이 새겨져 있다. 석조의 윗부분에는 경주 부윤 이 필영이 조선인조 (재위1623~1649) 16년에 이 석조를 흥륜사 (신라 최초의 절)에서 경주읍성 안 금학현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이 새겨진 반대편에는 이교방이 무자년 유두날 이 석조를 보고 지은 칠언절구가 있다.
측면에는 석조에 담김 물에 하늘이 비친 것을 표현한 天光雲影을 크게 새겨 넣었다.
석조 금강역사상 : 경주 구황동 절터 출토
연 대 : 통일신라 8세기
이 금강역사2구는 본래 분황사 동쪽 도로 건너편 구황동 절터에 있던 것인데, 191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왔다. 이 절터에는 아직 석탑 지붕돌, 주춧돌과 함께 네 구의 금강역사상이 남아 있다. 또 이 절터에서 분황사 모전석텁과 같은 안산암으로 만든 벽돌모양 석재등이 발견되었는데, 이 절터에도 분황사처럼 모전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이 금강역사들도 분황사 모전석탑처럼 구황동 절터 모전석탑 1층 감실입구 좌우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금강역사는 원래 인도 고유의 신이었는데, 불교 성립이후에는 부처님과 그의 말씀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었다.그런대 왜 꼭 쌍으로 만들었을까? 금강역사를 자세히보면,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과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 두 종류이다. 입을 벌린 모습을 아 阿형 이라 하고, 입을 다문 모습을 훔형 이라 한다. 梵語로 '아'는 입을 벌렸을때 나는 가장 첫 소리이고, '훔'은 입을 다무는 마지막 음성이라고 한다. 입을 벌리고 있는 금강역사와 입을 다문 금강역사를 함께 두는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과 그 말씀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았던 것이다.
등은 불을 밝히는 도구이다. 석등은 돌로 만든 등기구이니, 절에서뿐만 아니라 궁전,관청,여염집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유독 절에 석등을 많이 만들었을까? [등지인연경]이라는 불교 경전에는 등불은 부처님의 진리를 비춰 줌으로써 모든 무리들이 착한 길을 택하게 한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는 복을 받기 위해서이다. [시등공덕경]에는 탑과 불상앞에 등불을 밝히면, 수미산 (불교에서 우주 중심으로 여기는 곳) 꼭대기인 도리천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즉 내세에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등 공양을 한 사람은 죄가 없어진다고도 한다. 절에 등을 많이 밝힐수록 죄 사함을 받고 내세에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등은 백제인들이 만든 익산 미륵사터 석등이다.
팔각 연꽃무늬 상대석과 팔각 화사석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가늘고 긴 팔각기둥의 석등이 주로 만들어 졌다. 이와 함께 둥그런 기둥 중간에 굵은 마디를 두어 북 모양을 띠는 석등,사자 두 마리가 화사석을 떠 받치고 있는 석등도 만들어졌다.
석등 : 경주읍성 터 출토
연대 : 통일신라 8~9세기
경주읍성에 있던 이 석등은 하대석, 기다란 팔각기둥,그리고 상대석 일부만 남아 있었으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복원한 석등의 높이가 거의 6미터에 이르는데, 통일신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큰 석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선사(高仙寺)
고선사는 원래 알천 상류인 경주시 암곡동에 있던 절로,현재 이곳은 덕동댐 건설로 수몰 되었다.[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절은 신문왕(재위681~692)때 원효대사가 머무르던 곳이라고 한다. 1914년5월 원효대사 행적을 기록한 서당 화상비 조각이 발견되어 원효대사가 입적한 686년 이전에 사찰의 면모가 갖추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에는 '현종(재위992~1031)12년(1021) 고선사의 금란가사와 불정골등을 내전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1975년 이 절터를 발굴하였는데, 금당터,강당터,중문터, 회랑터 등의 건물 터를 확인 하였고, 금동불,기와,전돌 등 문화재를 찾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