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 탐방(1)
경북대학교 야외 박물관 '월 파 원(月坡園)'
월파란 원래 " 달의 계수나무 언덕" 이란 뜻으로 경북대학교 야외 박물관 모습이 그를 연상 시킨다고 해서 1965년 건설 될 당시에 총장(계철순)의 아호를 따 "월파원"이라 이름 붙였다.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조부도 2점과 인흥사지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대구,경북 각 지역에서 수집 된 불상,석탑,비석,문인석,주춧돌등 100여점의 각종 석조문화재를 언덕에 조화롭게 배치 함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다양하게 꾸며진 야외 박물관중 하나로 꼽힌다.
건물 북편에는 대구 남구 이천동 및 달서구 상인동의 청동기시대 고인돌군, 경북 칠곡군 약목면의 삼국시대 고분 (약목 대옹총)등의
무덤 유적을 발굴한 다음 이전해서 복원 해 놓았다.
석조부도(石造浮屠) : 보물 제135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1370 경북대학교 야외 박물관
제작년대 : 고려시대
부도는 승려의 사리를 모셔 놓은 곳으로, 사리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세워져 있는 이 부도는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의 아래받침돌은 4각이며 각 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동그스름한 8각으로, 표면 전체에 구름이 새겨져 있으며, 앞·뒤·좌·우에는 용 네 마리가 도드라지게 조각되어 있다. 각이 선명하고 강인함이 느껴지는데, 여기에서도 고려시대의 기상이 묻어나온다.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앞·뒷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그 좌우에는 불법을 지켜주는 4천왕(四天王)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 역시 8각이며, 꼭대기에서 가파른 경사를 보이다가 밑에서 넓게 퍼져 있다. 낙수면의 각 모서리선은 뚜렷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전체적으로 8각의 양식을 잘 따르면서도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곳곳에서 여주의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를 떠올리게 하지만 조각수법이 다소 뒤떨어져 있으며, 고려 전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탑신의 윗부분이 조금은 움츠러든 감이 있으나, 가운데받침돌에 새겨진 구름과 용무늬는 기단부의 웅장함을 돋보이게 한다.
일본인의 집에 있던 것을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놓았으며, 원래의 위치나 주인공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조부도(石造浮屠) : 보물 제258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1370 경북대학교 야외 박물관
제작년대 : 고려시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각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네모진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아래받침돌 옆면에는 사자를 새겨 놓았고, 윗면에는 구름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 낮은 가운데받침돌은 모서리를 죽이고 각 면마다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새겼다. 윗받침돌은 가운데 띠를 돌리고 아래·윗면에 소박하면서도 큼직한 연꽃을 조각하였다.
사리를 모셔놓은 탑신(塔身)은 낮은 편이며,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과 보살상(菩薩像)을 조각하였다.
넓은 지붕돌은 밑면에 향로와 비천상(飛天像)을 아름답게 새겼으며, 처마부분은 목조건축의 지붕양식을 따라 2중의 서까래를 촘촘히 본뜬 조각이 있다. 윗면에는 연꽃이 둘러져 있으며 그 위의 4면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새인 가릉빈가(迦陵頻伽)를 조각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올려져 있다.
이 부도는 지붕돌 일부가 깨지고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위아래의 비례가 잘 맞아 아름다운 작품이다. 각 부분의 조각이 웅장하고 뛰어나며,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대구의 일본인 사택에 있던 것을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긴 것으로, 원래 부도가 세워진 터와 이 부도의 주인공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 : 보물 제997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1370 경북대학교 박물관
제작년대 : 삼국시대
북지리의 마애불좌상 옆에 있던 것을 1966년 경북대학교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높이 1.6m 가량에 상반신은 깨져 없어지고, 하반신과 다른 돌로 만든 둥근 연꽃무늬 발받침대만이 남아 있지만, 우수한 조각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상반신은 옷을 벗은 듯 하고 하체에 표현된 옷은 매우 얇다.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오른쪽 다리는 매우 크고 무릎을 높이 솟게 하여 강조하고 있다. 올려 놓은 다리 밑에는 3단으로 옷주름이 부드럽게 흐르는데 그 선이 분명하다. 이들 옆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고리와 화려한 구슬 장식이 있다. 불상의 뒷면은 옷주름만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어 앞면을 위주로 조각했음을 알 수 있다. 발받침대는 약 70cm의 원반형으로 아래로 향한 연꽃이 7잎 새겨져 있다.
이 반가상은 양식면에서 국보 제83호 금동보살반가상과 비교될 수 있으며, 왼손의 위치, 오른쪽 무릎의 팽창, 사실적인 옷주름, 화려한 구슬 장식 등에서 뛰어난 조각기법을 나타낸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당당하며 볼륨이 강조된 독특하고도 사실적인 표현수법을 보여주는 7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나 한 상
나한상 이란 깨달음을 얻어 존경받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아라한의 줄임 말이다. 이는 본래 고대인도에서 뛰어난 수행사를 가르키는 호칭 이었는데, 초기 불교에서 채용하여 부처를 뜻하는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후세의 소승불교 에서는 불제자가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의 지위로 부처와는 구별하여 썼으며, 대승불교 에서는 아직 대승의 구도자인 보살에는 이르지 못한 수행자를 가르키는 말로 썼다.
통일신라시대의 이 나한상은 큼직한 화강암 내석의 얕은 감실속에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머리는 약간 앞으로 숙인 채로 두 손을 무릎 위에 겹쳐놓고 명상에 잠긴 모습니다.
전체높이 76cm, 너비 135cm으로 경주에서 출토 되었다.